나 자신에게 정말 궁금한 것
물어보고… 그중 하나라도
답하고 싶은 것을 글로 옮긴다
물어보고… 그중 하나라도
답하고 싶은 것을 글로 옮긴다
인터뷰 작업을 하다 상대방의 심중이 깊이 궁금할 때, 자주 하던 질문이 하나 있다. “지금 선생님께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많이 보는 일간지의 1면을 통으로 드린다면 어떤 이야기를 쓰고 싶나요?” 1940년생 정치학자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고, 르포를 주로 쓰는 작가는 “여전히 세월호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말했고, 1992년생 젊은 작가는 “병명을 아직 못 찾은 채 투병 중인 친구 사연을 쓰고 싶다”고 밝혔다. 이들은 모두 오래 고민하지 않고 답했다. 스스로의 머릿속, 마음속을 인지하고 사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 질문을 각별히 마음이 가는 사람들에게 했을까. 상대의 현재 관심사, 평소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그리고 세상에 가 닿았으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일간지 1면이라는 장치를 넣은 건 상징성, 그리고 인터뷰이에게 어떤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싶었다. 지금은 신문을 보는 사람의 숫자가 적으니 “구독자 500만을 보유한 유튜브 채널에 나가서 하고 싶은 이야기”로 질문을 바꿔야 할지도 모르겠다.
글쓰기 수업을 할 때도 수강생들에게 끊임없이 질문한다. 왜 글이 쓰고 싶나요? 그림을 배울 수도 있고, 운동을 할 수도 있는데 왜 글을 선택했나요? 글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인가요? 필자로서 갖고 싶은 캐릭터가 있나요? 작문을 배우러 온 사람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이유는 자각하고 쓰는 글과 무의식에서 출발하는 글은 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글감이 없어 시작조차 어렵다는 사람에게 나는 스무 개의 질문을 보내며, 이 중 하나라도 답하고 싶은 질문이 있다면 일단 써볼 것을 권했다. 물음표가 느낌표가 될 수도 있고, 다시 물음표로 돌아올 수 있지만 질문은 씨앗 같아서 언제 싹을 틔울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지금 저 인터뷰하는 건가요?” 직업병인가, 습관인가. 초면에도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고 늘려 놓는 버릇 탓에 지인들은 나에게 종종 “질문병에 걸렸냐”고 놀려댔다. 나는 질문을 들으면 반색하는 편이라 즉답했다. “질문을 받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경험이야. 왜냐면 누군가에게 궁금한 대상이 되었다는 의미니까.” 올해 데뷔 40년을 맞은 한 배우는 인터뷰에서 말했었다. “늘 소망하는 건 대중들에게 궁금한 대상이 되는 일”이라고. 이 매력적인 답변을 나는 두고두고 써먹었다.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너 지금 힘들어? 무엇 때문에 힘든 것 같아? 너를 가장 힘들게 하는 대상은 뭐야? 챗GPT에게 쉽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지만 인내심을 갖고 방향을 내 쪽으로 튼다. 선뜻 답이 나오지 않을 때가 많지만 질문을 던진 사실만으로도 성찰할 기회는 따라온다.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서는 질문하는 과업을 필히 선행해야 하기에.
“좋은 질문은 어떤 질문인가요?” 수업을 마칠 때마다 질문을 권했기 때문일까, 주기적으로 듣곤 하는 질문을 또 들었다. “당신이 정말 궁금하다면 그건 모두 좋은 질문이에요. 나쁜 질문은 궁금하지 않은데 억지로 짜내서 하는 물음이죠. 방금 하신 질문은 좋은 질문이에요.”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을까? 수강생은 알듯 말듯 갸우뚱하는 표정을 짓고는 자리에 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불쾌한 질문은 그럴듯한 거짓 질문이다. ‘제가 이런 것까지 아는 사람입니다만’의 속내가 바로 읽히는 매우 추상적이고 꼬인 질문, 핵심 없는 장황한 질문은 서로에게 무의미하다.
필사책이 다시 유행하고 있다. 아포리즘, 시를 필사하는 책부터 마음챙김, 어휘력을 높여준다는 필사책까지. 쓰는 행위가 주는 이로움이 분명 있지만, 타인의 성찰을 옮겨 적는 일보다 자신에게 다양한 질문을 던지는 습관이 선행되면 어떨까? 물론 타자에게도.
그나저나 나는 또 묻고 싶은 것이다. “훗날 당신의 인터뷰가 유튜브에 올라간다면, 영상 섬네일에는 어떤 문구가 적히길 원하는가?”
엄지혜 작가·에세이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