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출생의 저자는 일본 니혼대학 국문학과 교수다.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자기소개는 쉽게 끝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자신을 소개하면 “국문학이면 한국 문학을 말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에서 시작해 “재일 교포시구나”라는 말로 끝난다. ‘국문학’은 ‘일본인이 일본인을 위해 일본어로 쓴 문학’이라고 배운 일본인도 한국인이 일본에서 국문학을 가르친다고 하면 어리둥절해진다. 책은 교환학생으로 일본 도쿄 살이를 시작한 1994년 이후 30여년 동안, ‘경계인’으로 살아온 저자의 단상을 담은 분투기다.
도쿄 입성 첫해를 생각하면 저자는 격세지감이 저절로 느껴진다. 당시 창문을 열어 놓고 김치찌개를 끓이면 여기저기서 신경질적으로 창문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일본인들은 마늘 냄새를 지독히도 싫어했다. 저자는 ‘구수한’(한식)의 일본어가 ‘구사이’(썩은 냄새)의 대명사임을 금방 눈치챘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자신들보다 뒤떨어진 문화에서 온 사람들로만 생각했다. 한국 유학생은 집을 임대하려는 주인을 찾는 것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한편으론 한국은 그냥 관심 밖이기도 했다. ‘88 올림픽’이 서울에서 개최된 사실은 알아도 서울이 한국에 있는 도시라는 것을 모르는 일본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사이 많은 일이 있었다. 저자는 문화의 변화를 섬세하게 짚어낸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한국에 관한 관심이 커졌고, 한국의 대중문화가 대유행을 이뤘다. 2003~4년 무렵 ‘겨울 연가’에서 ‘대장금’으로 이어지는 한국 드라마를 보면서 일본인들은 한국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저자는 힘든 유학 시절, 한국어 붐을 타고 경매 사이트에서 한국 책을 팔아 생활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언제부턴가 텔레비전에는 구사이의 대명사 ‘기무치나베’(김치찌개)의 양념 광고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저자는 문학 연구자이지만 문학 작품보다 오래된 신문이나 잡지 읽기를 좋아한다. ‘문학 상품’이 부상하고 ‘문학적 가치’가 부여되는 과정을 조사하기 위해서다. 책에는 그의 관심과 그 결과물들이 곳곳에 배어 있다. 예를 들면 1987년 출간된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베스트셀러가 된 사연도 소개된다. 물론 출간 당시에도 주목을 받긴 했지만 88년 크리스마스에 맞춰 빨강과 초록, 금색이 어우러진 맞춤 디자인으로 무장한 크리스마스 선물용 마케팅이 주효했다. 당시는 히로히토 일왕의 병세가 악화하면서 숙연함으로 강조하는 분위기였는데 그에 맞선 대항 상품으로 부각되며 성공을 거둔 것으로 저자는 해석했다. 일본 국민 작가로 불리는 나쓰메 소세키가 러일전쟁 이후 일본 제국대학 교수 자리를 버리고 아사히신문 기자로 활동한 이유도 흥미롭게 읽힌다.
저자는 한국에서나 일본에서나 악의 없는, 때로는 선의에서 비롯된 무의식적 차별을 겪는다. 한국에서는 광주 사투리와 일본어 억양 때문에 “북한에서 왔느냐” “재일 교포냐”는 소리를 자주 듣는다. 일본에서 산 기간만 따지자면 저자보다 훨씬 적은 20대 일본 학생들은 수업 평가에서 선생님의 일본어 실력을 칭찬하는 여유를 부리기도 한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는 하나’라는 환상 속에 우리 아닌 다른 이를 배제하는 문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한국과 일본에서 ‘친절한 손님 대접’을 톡톡히 받고 있다면서도 “좋으면서도 씁쓸하다”고 말한다.
이와 더불어 저자는 2011년 3월 11일 일어난 동일본대지진을 겪은 후 문학 연구라는 좁은 세상에서 나와 현실에 눈을 뜬 경험과 뇌하수체 종양으로 시력을 잃을 뻔했던 이야기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저자의 체류 기간이 일본의 ‘잃어버린 30년’과 겹친 덕분에 일본의 사회 변화상도 생생하게 들을 수 있다.
맹경환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