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자란 내게 가장 생생하게 남아 있는 기억 중 하나는 예배당 장의자다. 그 의자 냄새는 조부모님 옷장 냄새와 비슷했다. 사실 의자가 편안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설교 시간에 잠을 자기도 힘들었다. 그 딱딱한 나무 의자나 냄새를 그리워한다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장의자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 빡빡하게 서로 밀착해서 앉아야만 했던 게 그립다.
피곤하든 딴생각을 하든, 아니면 무심코 찬송가 책장을 넘기고 있든 간에 우리는 늘 함께였다. 한 줄로 길게 앉아 무릎이 불편할 만큼 맞닿고 팔꿈치로 툭툭 치면서 농담을 주고받고, 좋아하는 사람의 옆자리를 먼저 차지하려고 눈치 싸움을 하던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다. 예배당에 늦게 오면 혼자 여유 있게 앉을 자리가 부족했다. 빈 곳이 있는 의자를 찾아 몸을 비틀며 들어가야 했고 때때로 다른 교인들과 밀착해 앉아야 했다.
오늘날 현대 교회는 쿠션감 좋은 개인 의자를 사용한다. 이 의자들이 다 나란히 놓여 있더라도 각각의 의자는 교인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예배는 오로지 당신을 위한 것이다. 예배하는 동안 당신의 공간은 당신만의 것이다.’
이는 교회가 레스토랑처럼 변해가는 여러 방식 중 하나다. ‘자리를 고르세요’ ‘설교를 고르세요’ ‘공동체를 고르세요’ ‘편안함과 선호도에 따라 당신 맘에 드는 것으로 고르세요.’ 장의자에서 개인 의자로 바뀐 게 별거 아닌 변화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장의자를 떠나는 순간 우리는 나도 모르게 나를 빚어가던 어떤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장의자는 고립된 편안함 속에 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콧물 흘리는 아이, 틀린 음정으로 찬양하는 아이, 혹은 짝사랑하던 여자를 훔쳐간 남자 옆에도 같이 앉아야 했다. 장의자에서 친밀함은 타협할 수 없는 요소였다. 장의자는 말한다. ‘내가 여기 있고 또 그들도 여기 있다.’
아무리 불편해도 장의자는 우리가 다 가까이 있음을 가르쳐 주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심지어 지루할 때도 누군가는 나와 똑같이 지루해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들키지 않고 속삭이는 법, 휘갈겨 쓴 메모에 웃음을 감추는 법도 배웠다.
장의자에 앉아서 나는 예배가 공동체 중심이어야 하고 그렇게 드릴 때 훨씬 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거기서 나는 단순히 찬송을 부르는 법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 머리 위로 찬송을 불러줄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희미한 불빛 속에서 흘린 눈물은 가까이 다가서야 비로소 반짝거리며 보인다는 것도 배웠다.
우리는 이제 장의자가 제공했던 긴밀한 소통을 무시한다. 첫 찬송이 끝날 무렵 단지 설교를 듣기 위해 서둘러 들어가기도 하고 축도 중에 교회를 빠져나가기도 한다. 교인들 사이의 가벼운 대화는 당연히 생략된다. 서로 너무나 빨리 스쳐 지나가다 보니 상대의 이름을 외우지도 못한다. 우리는 꼭 필요한 것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모인다. 느리게 사람을 만들어가는 공동체의 마찰을 우리는 개인주의의 빠른 편안함으로 바꿔버렸다.
그렇다고 장의자를 다시 설치하자는 건 아니다. 편안한 개인 의자를 비난하는 것도 아니다. 의자가 우리를 구원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길고 어색한 인사 시간, 스크린 대신 손에 든 찬송가책, 더 간소해진 예배 밴드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이런 변화들이 풍요로운 소비문화 속에서 우리가 교회를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보여주는 징후라는 점은 돌아봐야 한다.
어쩌면 영적 빚어짐은 각자의 편리함이 아니라 함께 모이는 거룩한 어색함 속에서 일어나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춥거나 더운 방에서, 우리의 희망과 무관심, 믿음과 의심을 부둥켜안고 매주 함께 모이는 바로 그 자리에서 말이다. 코를 골거나 자기식으로 음을 다스리며 찬송을 불러도, 이름은 기억하지 못해도 여전히 형제자매라 부르는 사람 옆에 앉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영적 성숙이란 낯선 이의 옆자리에 충분히 오래 앉아 있은 덕에 마침내 그의 얼굴이 익숙해지는 경험인지도 모른다. 교회 선택은 얼마나 편안한지가 아니라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우선해야 한다.
장의자가 그리운 건 좋은 냄새 때문이 아니라 나를 결코 혼자 내버려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의자는 교회가 단지 나만을 위한 곳이 아니라 더 큰 공동체의 일부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 유진 박은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 트루노스교회(True North Church) 협동목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