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국제 질서를 바꾸고 있다. 미국의 국익이 최우선이다. 자유무역은 위축되고 문화적 정체성을 둘러싼 갈등은 커지고 있다. 약소국 대 강대국, 자유 진영 대 공산 진영 같은 대립 구도가 다시 주목받는다. 트럼피즘(Trumpism)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세계 정상들 사이에서도 독주했다. 지난주 경주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그는 일방적인 관세와 투자 요구를 관철하고는 전체 회의가 열리기 전날 혼자 돌아갔다. APEC 정상들은 그럼에도 화려한 금박 선물을 건네고 트럼프의 업적을 찬양하면서 그를 달래려고 애썼다.
이런 트럼프 대통령을 미국 교회에선 기독교적 가치를 존중하고 교회를 지키는 수호자처럼 부른다. 모럴 머저리티(Moral Majority)운동 설립자의 아들인 제리 폴웰 주니어는 트럼프가 당선되자 “복음주의자들이 꿈꾸던 대통령을 찾았다”고 환영했다. 트럼프를 지지하는 기독교인들은 그를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이끈 모세, 포로생활에서 유대 민족을 해방시킨 페르시아의 고레스(키루스) 왕에 비유하기도 한다.
트럼프는 도덕적인 약점이 많다. 성 추문 같은 과거 문제만이 아니다. 정치적 반대자를 악마화하고 갈등을 극단적으로 확대해 이득을 취한다. 불법 이민자 단속은 법적 절차와 한계를 넘어 전쟁을 벌이듯 한다. 미국의 보수 기독교인들은 왜 이런 문제를 간과하는 것일까.
트럼피즘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자’(MAGA·Make America Great Again)는 구호로 다 설명할 수 있다.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와 반이민 정책, 고립주의 등 단기적으로 미국에 이익이 된다면 뭐든 하겠다는 내용이다. 관세 부과에서 보았듯 협의나 토론 같은 과정은 없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백인 인종주의, 백신 반대, 지구온난화 부정, 반대파에 대한 음모론적 비난 같은 극우적 요소도 두드러진다.
또 보수 기독교계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수용해 낙태 반대, 동성애 합법화 반대를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다시 세우겠다는 약속도 했다.
트럼피즘에 호응하는 미국 교회의 흐름을 ‘크리스천 내셔널리즘(Christian Nationalism)’이라고 부른다. 기독교 민족주의, 혹은 기독교 국가주의로 번역할 수 있다. 공공종교연구소(PRRI)는 지난해 조사에서 미국 성인의 약 10%를 적극적인 크리스천 내셔널리스트, 20%를 동조자로 분류했다. 반대 입장은 66%였다. 2022년 퓨리서치센터 조사에서는 성인 45%가 미국은 기독교 국가여야 한다고 답했다. 건국 이념이 기독교 국가라고 생각하는 미국인은 60%였다.
트럼프 집권 2기의 설계자라 불리는 러스 보우트 백악관 예산관리국장이 대표적인 크리스천 내셔널리스트다. 정부 셧다운 국면을 주도하고 있는 그는 2023년 아이다호 뉴세인트앤드루대 강연에서 불법 이민자들이 인신매매와 마약 거래에 연루됐다고 비판하면서 “기독교인은 자기 이웃의 난민을 돌보면서도 수천 명의 난민 유입과 전쟁 참전을 반대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기독교에 열정을 가진 인물을 고위 공무원 자리에 임명해야 한다는 주장도 했다. 백악관 국토안보 보좌관 스티븐 밀러는 유대인이면서도 크리스천 내셔널리즘의 강력한 지지자다. 크리스천 내셔널리즘이 신앙보다는 정치운동에 더 가깝다는 걸 보여주는 셈이다.
크리스천 내셔널리즘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고 교회가 탄압받고 있다는 종말론적 역사관, 미국은 이스라엘을 잇는 선택받은 국가라는 아메리카 시오니즘을 바탕에 깔고 있다. 대표적 인물인 더그 윌슨 아이다호 그리스도교회 목사는 지난 9월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뷰에서 “미국을 세속화하려는 프로젝트는 실패했다. 그 어떤 사회도 초월적인 토대 없이는 기능할 수 없기 때문”이라면서 “국가 위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면 국가 자체가 신이 된다. 시민의 정부는 기독교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교회 안에 비판의 목소리도 있다. 팀 켈러 목사는 2021년 한 기고문에서 “내가 목회를 시작하던 1970년대에도 이런 흐름이 있었다”면서 이를 “미국식 애국주의와 백인의 기득권 지키기를 기독교와 맹신적으로 뒤섞은 위험한 우상숭배”라고 지적했다. 랜들 발머 다트머스대 석좌교수도 크리스천 내셔널리즘은 백인 우월주의라고 단정했다. 그는 ‘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이라는 저서에서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는 보수적 복음주의 정치운동은 인종 분리를 영구화하려는 뿌리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백인 복음주의자를 제외하면 실제로 트럼프를 지지하는 기독교인은 과반이 안 된다.
트럼피즘의 등장은 미국이 직면한 사회경제적 모순 때문이라고 미국 한인유권자연대 송원석 사무총장은 진단했다. 그는 지난 5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청교도 정신을 바탕으로 한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처럼 흠 많은 지도자를 지지하는 게 밖에서 보기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이건 미국 교회의 정치적 계약이나 전략적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중요한 계기는 2012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이었다고 한다. 흑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소수인종 우대, 성적 다양성 보장, 탈기독교 문화 분위기가 빠르게 확산됐다. 대학 입시나 기업 채용에서 인종의 다양성이 우선됐고, 성 중립 화장실이 등장하고 성전환 수술도 확산됐다. 성탄 시즌에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인사말을 금지하고 “해피 할리데이”를 권장했다. 이런 분위기에 불만이 가득했던 남부 바이블 벨트의 백인 유권자들이 트럼피즘을 환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송 사무총장은 “많은 미국인이 경제적으로 소외되고 문화적으로 불안감을 느끼기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다음 대선에 나오지 않더라도 트럼피즘의 기조는 미국 정치에서 계속 힘을 발휘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트럼피즘처럼 정치인이 종교적 열광을 받는 현상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토론토대 팅 구어 교수는 “어떤 중국인은 마오쩌둥을 신처럼 모시고, 시진핑 주석도 자애로운 아버지 이미지를 강조한다”고 지적했다. 민주주의 체제에서도 정치인이 다수의 지지를 얻기 위해 대중이 갈망하는 힘과 불굴의 의지를 강조하고, 고난을 이겨낸 승리의 서사를 늘어놓는 일이 흔하다. 가톨릭 신학자 윌리엄 캐버너는 저서 ‘신학, 정치를 다시 묻다’에서 “세속적인 정치 이론은 실제로는 위장한 신학”이라며 “근대 국가는 국가가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준다는 일종의 구원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크리스천 내셔널리즘은 민족 복음화를 추구해온 한국교회의 신앙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처럼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의 사회 정책은 교회를 보호해주리라는 기대를 하게 한다. 강유덕 한국외대 교수는 이를 위험한 유혹이라고 지적한다.
“트럼피즘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보호 욕구가 커지면서 국가 간에도 긴장과 경쟁이 강화되며 나타난 것이지만 기독교 신앙마저 국가 이익이나 정치적 입장에 종속되어선 안 된다.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의 보편 윤리는 국경과 인종 이념을 초월한다.”
김지방 종교부국장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