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죽음 헛되지 않게… 현지인 삶 바꾼 ‘가나안’ 사역

입력 2025-11-06 03:06
채법관(앞줄 왼쪽 네 번째) 선교사가 최근 말레이시아 가나안농군학교에서 현지인들에게 농업교육을 하며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고 있다. 채 선교사 제공

2011년 8월 6일 말레이시아. ‘죽임당하신 어린 양’ 뮤지컬 공연을 마친 30여명의 북아현교회 단기선교팀은 사역 마지막 날을 맞았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말레이시아 파송 1호인 채법관(63·아래 사진) 선교사는 이들과 함께 ‘팁 오브 보르네오(보르네오의 끝)’로 이동했다. 바다에 수영하러 간 청년 세 명이 순식간에 너울성 파도에 휩쓸렸다. 두 명은 구조됐지만 스물한 살 한 형제는 바다로 사라졌다.


언더우드선교상 수상을 위해 귀국한 채 선교사는 최근 국민일보와 만나 26년 동안의 선교 여정을 회고하면서 “당시 모든 걸 중단하고 떠나려 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통 속에서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 12:24)는 말씀을 붙잡았다”고 전했다.

청년의 죽음은 헛되이 잊히지 않았다. 사고 이듬해 이 형제의 아버지가 아들의 보험금을 헌금했다. 단기선교팀 인솔자 부부는 채 선교사의 동역자가 됐다. 현지 기독교계 기업인과 변호사가 나서 땅을 기증했다. 66만1157㎡(20만평) 넓이의 농장에 가나안농군학교와 난민학교가 세워졌다.

채 선교사가 처음부터 가나안농군학교 사역을 한 것은 아니었다. 1999년 말레이시아에 와 오지에 30여개의 교회를 개척하다 만난 한 무슬림의 질문이 사역의 방향을 바꿨다. “기독교인들은 말레이시아에서 우리보다 못 살고, 도덕적으로 나은 게 없는데 왜 우리가 당신의 신을 믿어야 하느냐.” 교회만 세우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다.

채 선교사는 ‘근로, 봉사, 희생’을 가르치는 한국의 가나안농군학교 모델을 발견했고 이를 통해 종교와 상관없이 현지인들의 세계관과 삶의 태도를 바꿨다. 그는 “훈련 후 비기독교인들이 ‘당신과 같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라면 나도 신앙을 가져보겠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의 사역을 통해 복음을 전한 이들이 20만명에 달한다고 덧붙였다.

말레이시아로 오기까지 개인적인 고난이 있었다. 1997년 서울 북아현교회 부목사로 사역하던 중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 ‘네가 좋아서 한 거냐, 내가 시켜서 한 거냐’라는 마음의 소리를 들었고, 선교사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고 고백했다.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있었고 부친마저 파산했다. 암 환자를 받아주는 선교단체도 없었다. 극구 반대하던 아내는 마침 앞치마가 떨어지자 “선교지에서 앞치마가 오면 소명을 따르겠다”는 조건을 걸었다. 공교롭게도 며칠 뒤 어머니가 “한 선교사님이 말레이시아 앞치마를 선물로 주셨다”고 전화했다. 결국 부부는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7년 후 은퇴하는 그는 모든 사역을 현지 말레이시아 바젤기독교회(BCCM)에 이양하는 절차를 밟고 있다. 채 선교사는 “이양이 마무리되면 날 필요로 하는 다른 곳으로 떠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용현 기자 fac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