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가정에서 여섯 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인천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시골 마을, 6·25전쟁을 맞아 부모님이 피란 내려와 정착한 곳이었다. 중·고등학교를 인천에서 마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간 나는 입학과 동시에 군에 자원입대했다. 제대 후 복학을 위해 서울 형님댁에 머물며 작은아버지가 운영하시던 T그룹에 들어가 경영을 배우고 밤에는 공부했다. 세상을 하나하나 배워 가던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막 군을 제대하고 형님 집에 얹혀 지내던 나는 외로움이 컸다. 무엇보다 채워지지 않는 ‘정’이 그리웠다. 형님이 처제를 집으로 불러 “내 동생이 서울을 잘 몰라서 그런데, 데리고 나가 점퍼 하나 맞춰 주라”라고 부탁했다. 가죽을 건네받아 노량진 거리의 작은 양복점에 함께 갔을 때 내 옷을 정성껏 챙겨주던 그녀의 손길과 표정에서 어머니의 정을 느꼈다.
조카들이 ‘이모’라 부르던, 지금의 아내를 나는 사랑하게 되었다. 밥도 잘 먹히지 않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감명 깊게 읽었던 알퐁스 도데의 ‘별’, 황순원의 ‘소나기’가 심어 준 순정의 사랑이 내 안에서 꿈틀거렸다.
우리 사랑은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겹사돈’에 해당하는 복잡한 관계였기에 양가 어른들의 반대가 있었지만, 나는 집안 막내라는 특권 덕분에 결국 축복 속에 결혼할 수 있었다. 아내는 아름답고 헌신적이며 청초하고 사려 깊었다. 우리의 결혼생활은 행복했고, 민정이와 재승이를 얻었다.
30대 초반 나는 그룹의 해외 차관을 담당하며 밤낮없이 일했다. 성실하고 충성스러웠다. 그러나 그 시절 한국 직장 문화는 퇴근 후 술자리가 일상이었다. 나는 수입과를 맡아 미국에서 원면을, 세계 각국에서 염료와 방직기계를 들여왔다. 당연히 술 접대 자리가 많았다. 아내는 달력에 내가 술 먹은 날 빨간 동그라미를 표시했는데, 1년 365일이 거의 다 붉게 칠해져 있었다.
그러다 30대 후반, 큰 충격을 맞았다. 지방간과 간염을 진단받은 것이다. 입원한 병동에 한 중년 여인이 들어와 전도지를 건네고 갔다.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젊은 아내와 두 아이, 부모님이 떠올랐다. 눈물이 났다. 전도지를 집어 들고 병원 예배당으로 내려갔다. 예배당은 칠흑같이 어두웠지만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생애 처음으로 기도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살려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살겠습니다.”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부모님도 아내도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처지임을 인정한 밤이었다.
다음 날 중학교 졸업 후 20여년 간 소식도 없던 친구가 병실을 찾아왔다. 외항선을 타다 잠시 한국에 들른 그가 여의도에서 내 소식을 듣고 온 것이었다. 그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외항선을 타고 낯선 나라들로 향하던 밤, 밀려오는 쓸쓸함과 외로움과 두려움 속에서 주님이 지켜 주셨다는 간증이었다. 나는 그날 저녁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구원자로 영접했다. “머리털 하나도, 키 한 자도 스스로 더할 수 없다”라는 말씀을 가슴에 품으며 아직 희미하지만 확실히 입술로 고백했다. 따뜻한 손길로 주님이 나를 안아 주시는 것 같았다. 의사도 “괜찮다”라고 말했다. 그때는 ‘주님이 고쳐 주셨나?’ 반신반의했다.
정리=전병선 선임기자 junb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