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존엄사’ 용어 너무 쉽게 쓴다

입력 2025-11-06 00:38

지난 추석에 고향집을 찾았더니 팔순의 노모가 안방 서랍장 위 유리판 밑에 끼워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이란 걸 꺼내 보여줬다. 몇 달 전 마을 복지관에서 상담받고 직접 신청했다고 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생애 말기나 임종기에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같은 연명 의료를 거부하거나 중단하도록 스스로 결정해 미리 문서로 남겨 놓는 것이다. 어머니는 “만일 그런 상황이 오면 연명 치료는 절대 안 받겠다”고 신신당부했다. 우리 형제자매가 고향집에 올 때마다 등록증을 볼 수 있도록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신 듯했다.

우리 사회도 죽음을 대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과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노모처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 사람이 지난 8월 기준 누적 300만건을 넘어섰고 사전 서약대로 연명의료를 중단한 사례도 45만건에 달했다. 2018년 연명의료결정제도가 시행된 뒤 많은 시행착오를 거쳤고 여전히 개선점이 있긴 하지만 점차 정착돼 가는 모습이다. 영화나 드라마 등에서도 생애 말기 죽음의 방식을 다루는 사례가 많아졌다. 최근 넷플릭스에선 의사 조력 자살이 합법화된 스위스로 떠나는 여성 말기암 환자와 이를 돕는 친구의 여정을 그린 드라마가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민들은 연명의료결정이나 의사 조력 자살, 안락사 같은 죽음의 방식에 대해 정확히 인식하고 있을까. 각각의 의료 행위는 분명 의미의 차이가 있다. 용어의 느낌과 무게감도 다르다. 연명의료결정은 무의미한 생명 연장만을 목적으로 하는 의료 행위를 시작하지 않거나 중단하는 것이다. 의사 조력 자살은 의사가 환자에게 약물을 처방하고 환자 스스로 복용해 죽음에 달하는 행위다. 안락사는 의사가 환자 요청에 따라 약물을 투여해 적극적으로 죽음을 유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존엄사’라는 주관적이고 미화된 용어가 너무나 쉽게 쓰이면서 대중의 뇌리에 잠재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 않나 싶다. 각종 매체 보도에도 각각의 의료 행위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혼용되거나 존엄사로 포장돼 쓰이는 게 현실이다. 의사 조력 자살을 합법화하는 법안은 ‘조력 존엄사법’이라는 이름으로 국회에 발의돼 있다. 이런 조력 존엄사법에 찬성하는 국민 비율이 80%를 웃돈다는 조사 결과가 나온 바 있다. 과연 이 같은 여론은 국민 정서를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여론조사는 어떤 용어를 쓰는지에 따라 찬반 비율이 달라질 수 있다. 존엄이라는 용어를 먼저 접한 경우 긍정적인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반대로 자살이라는 단어를 먼저 듣는다면 부정적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커진다.

최근 이런 난맥상을 뒷받침하는 연구 논문이 대한의학회지에 발표돼 관심을 끈다. 연구팀은 성인 1000명에게 안락사, 의사 조력 자살, 연명의료결정의 구체적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말기 환자의 의료 결정 관련 용어에 대한 인식을 물은 결과 존엄사는 세 가지 의료 행위를 효과적으로 구분하지 못하는 혼란의 원인으로 지목됐다. 연명의료결정 시나리오 응답자의 57.2%, 의사 조력 자살 시나리오 응답자의 34.3%, 안락사 시나리오 응답자의 27.3%가 이를 ‘존엄사’로 인식했다. 존엄사라는 용어가 실제 의료 행위의 법·윤리적 구분을 흐리게 하고 기존 다수의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를 왜곡시켰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존엄사는 따뜻하게 들리지만 실제로는 세 가지 의료 행위를 뒤섞는 위험한 언어적 착시를 일으킬 수 있다. 따라서 단순한 용어에 대한 찬반보다는 구체적인 시나리오와 맥락을 제시함으로써 국민들이 자신의 가치관을 반영한 성숙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학계와 정부, 언론은 생애 말기 의료 결정의 핵심 개념에 대한 객관적이고 정확한 용어 체계를 만들고 국민들에게 올바로 알리는 작업이 필요해 보인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