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다니는 산책로 바위틈에 백일홍 한 포기가 곧게 나 있다. 주변에 다른 풀과 꽃이 없어서 김소월의 ‘산유화’ 한 구절 ‘산에/ 산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를 연상시킨다. 오가며 한 번씩 백일홍 꽃송이를 들여다본다. 영하에 가까운 한파가 몰아치는데도 진분홍색 꽃잎을 떨구지 않았다. ‘어라, 잘 버티는데.’ 여린 식물과 달리 내 몸은 점점 움츠러들어서 한동안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두 주 만에 다시 산책로에 접어들었다. 꽃이 피었던 자리엔 검고 단단해 보이는 열매가 들어차 있었다. 빨간 젤리 같은 산수유나무 열매, 아직 푸른빛이 감도는 때죽나무 열매, 사람들의 원성에 아랑곳 않고 우수수 쏟아지는 은행 열매…. 기후 위기라지만 어김없이 열매의 계절이 돌아왔다.
다음 주 목요일 우리 집 수험생을 포함해 55만여명이 수능을 치른다. 수능 전야에는 큰아들이 전역할 예정이다. 막내는 생애 첫 지필고사를 앞두고 있다. 남편은 연말 실적의 압박을 견디는 중이고 나는 올해 말까지 완성하기로 약속한 초고를 붙들고 있다. 모종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는 생산의 강박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고양이뿐인가. 그냥 존재하기만 해도 된다는, 그분의 음성을 되살린다.
정혜덕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