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새의 계절인 가을이다. 가을 억새는 10~11월에 절정을 이룬다. 단풍이 짧은 기간 화려함을 뽐내는 대신 억새는 두 달 이상 무채색의 향연을 펼친다. 국내 억새로 이름난 곳 가운데 하나가 강원도 정선 민둥산이다. 66만여㎡로 광활하다. 산 정상에 오르면 탁 트인 세상이 온통 은빛 물결이다. 정상 부근 능선이 나무가 없는 둥근 봉우리로 이뤄져 이름 붙여졌다. 이런 민둥산은 화전민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민둥산은 해발 1119m에 이른다. 산 정상 부근에 나무가 없는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정상 주변에 나무가 사라진 것은 산불이 여러 차례 일어났기 때문이다. 지금은 정상부에 약 20만 평에 이르는 억새밭이 형성돼 있다. 산불이 일어난 뒤에 억새가 산을 덮는 데 걸린 기간은 약 20년이다.
민둥산 정상을 오르는 길은 총 4개 코스가 있다. 남면 증산초등학교를 출발해 쉼터를 거쳐 정상에 이르기까지 2㎞(1시간 30분)코스와 능전마을을 출발해 발구덕을 지나 정상까지 3.3㎞(1시간 20분)코스를 가장 많이 이용한다.
발구덕은 둥글게 움푹 꺼져 들어간 곳이라는 뜻의 순우리말이다. 발구덕마을은 예전부터 민둥산에 기대 살던 마을이다. 민둥산 9부 능선 기슭에 있다. 이름처럼 마을엔 곳곳에 깔때기 모양의 구덩이가 많다. 이곳의 구덩이는 전형적인 카르스트지형인 돌리네(doline)이다. 민둥산 정상에서 북동쪽으로 보이는 분화구처럼 생긴 지형도 바로 그것이다. 민둥산은 석회암으로 이뤄졌는데 오랜 세월 빗물에 녹으면서 싱크홀이 생겨나고 땅이 점점 내려앉아 구덩이가 됐다. 한라산의 백록담을 닮았다.
민둥산 일대에는 돌리네가 12개 있다. 억새밭 중간에 생성된 커다란 돌리네를 뚜렷하게 관찰할 수 있다. 산 중턱에 있는 ‘발구덕’이라는 마을 이름은 8개의 돌리네를 뜻하는 ‘팔구덕’에서 유래했다.
억새마을로 불리는 능전마을에서 해발 800m 지점에 있는 발구덕마을까지는 약 1.7㎞. 깔때기 모양으로 움푹 팬 거대한 웅덩이가 마치 다른 행성에 온 것처럼 생경하면서도 신비로운 풍경을 연출한다. 이곳의 싱크홀은 길이 40m, 너비 15m, 깊이 20m다. 주민들은 이 발구덕에 비닐하우스를 세우고 농사도 짓는다.
민둥산에서 가까운 곳이 하이원이다. 이곳에 숨겨진 자작나무숲이 있다. 백운산 자작나무숲으로 가는 길의 출발점은 하이원 밸리콘도다. 1983년쯤 조림한 우람한 낙엽송 군락지 한가운데 있다. 밸리콘도에서 출발한 길은 골프장까지 닿는다. 이어 ‘운탄고도 1330길’로 연결된다.
그 길엔 도롱이연못이 있다. 탄광 갱도가 무너지며 생겨난 작은 물웅덩이다. 광부의 아내들은 이곳에서 남편의 무사 귀환을 빌었고, 연못 속 도롱뇽이 살아 있는 한 남편도 안전할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바로 옆은 ‘꽃꺾이재’(화절령)다. 산골 아낙들이 진달래 등 야생화를 꺾으며 넘었다는 고개다. 길은 새비재 타임캡슐 공원까지 이어진다. 만항재(1330m)에서 화절령을 거쳐 새비재까지 이어지는 전체 하늘길은 40㎞에 육박한다.
타임캡슐 공원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타임캡슐을 묻었던 곳이다. 당시 영화에 등장했던 소나무가 지금도 ‘엽기 소나무’란 이름으로 자라고 있다. 새비재에서 예미역 방향으로 내려서는 고갯길도 아름답다. 한 굽이 돌 때마다 붉은 수피의 소나무들이 도열해 객을 맞는다.
가을철 정선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소금강’이다. 정선 소금강은 화암1리의 화표주에서 몰운1리의 몰운대까지 이어지는 약 4㎞의 계곡으로 동대천과 어우러진 기암절벽의 장엄한 풍경이 금강산에 버금간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겨울철 설경이 아름다워 설암으로 불리는 층암절벽의 꼭대기엔 푸른 소나무 한 그루가 쪽빛 하늘을 이고 있다. 절벽엔 몇 그루의 단풍나무가 나날이 붉은색을 더할 뿐 온 산을 울긋불긋한 물감으로 채색하고 있다.
여행메모
증산초 출발 민둥산 2시간 30분 내외
옛 석탄 운반 운탄고도 하이원 하늘길
증산초 출발 민둥산 2시간 30분 내외
옛 석탄 운반 운탄고도 하이원 하늘길
민둥산 출발지 중 인기 있는 곳이 증산초등학교 주변이다. 무료주차장이 마련돼 있다. 정상까지 2시간 30분 전후 걸린다. 발구덕 마을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차량 통제가 이뤄진다. 발구덕 마을에서 돌리네를 거쳐 민둥산까지는 40분가량 소요된다.
만항재와 새비재는 승용차도 오를 수 있을 만큼 편한 길이다. 만항재 아래는 만항재야생화마을이다. 곤드레밥, 토종닭백숙을 차려 내는 집들이 있다.
하이원 하늘길은 총 연장 40㎞다. 과거 석탄을 운반했던 운탄고도와 백운산 등산로를 연결해 조성한 길이다. 해발 1100m 고원지대에 있는 길은 백두대간의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하늘길로 둘러싸인 백운산은 약 2억5000만 년 전 고생대에 생성된 산으로, 자연 그대로의 원시림, 화산암이 해빙을 반복하며 균열이 생겨 떨어진 돌무덤인 ‘테일러스 지형’, 탄광갱도 등 인문자연 체험학습장으로도 인기가 높다.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는 둘레길(9.2㎞)과 무릉도원길(7㎞), 탄광의 흔적을 만나볼 수 있는 운탄고도길(5㎞) 등이 있다.
정선=글·사진 남호철 여행선임기자 hcna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