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괴한 B급 상상력, 할리우드 블랙코미디로 돌아오다

입력 2025-11-05 01:28
한국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리메이크한 할리우드 영화 ‘부고니아’의 한 장면. 원작의 각본·연출을 맡은 장준환 감독은 지난 9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부고니아’에 대해 “20여년 전 고민하며 만든 이야기가 태평양을 건너 멋진 감독·배우와 재탄생했다는 것만으로 떨림과 스릴이 느껴진다”며 “마치 외계인에게 잡혀 DNA 조작을 받고 다시 태어난 ‘지구를 지켜라!’를 본 느낌”이라고 말했다. CJ ENM 제공

장준환 감독의 2003년 데뷔작 ‘지구를 지켜라!’는 시대를 앞서간 비운의 걸작이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발함과 독창성을 갖췄으나 그 과격한 상상력이 당시 대중에겐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최종 관객 7만명, 흥행 성적은 참혹했다. 작품의 진가는 22년이 지난 지금에야 재평가됐다.

그 비운의 명작을 할리우드에서 리메이크한 영화 ‘부고니아’가 5일 국내 관객과 만난다. 원작의 투자·배급사 CJ ENM이 기획하고 제작에도 참여했다. 프로젝트가 급물살을 탄 건 영화 ‘유전’ ‘미드소마’의 아리 애스터 감독이 2018년 공동제작을 결정하면서다. 한국영화 마니아인 그는 영감을 받은 작품으로 ‘지구를 지켜라!’를 꼽은 적이 있다.

연출은 전 세계 영화계가 주목하는 요르고스 란티모스 감독이 맡았다. 특유의 독창적이고도 기묘한 작품 세계와 딱 맞아떨어지며 시너지가 배가됐다. 감독의 전작 ‘가여운 것들’(2023)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은 엠마 스톤, ‘카인즈 오브 카인드니스’(2024)로 칸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쥔 제시 플레먼스가 합류하며 기대감을 키웠다.

줄거리는 원작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음모론에 불과한 ‘외계인의 지구 침공설’을 신봉하는 두 청년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치는 대기업 대표를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 믿고 납치한다. 머리카락으로 외계인과 교신한다거나 개기월식일이 지구 멸망의 날이 된다는 등의 설정도 같다. 다만 시대에 맞춰 캐릭터엔 일부 변화를 줬다.

원작의 주인공 양봉업자 병구(신하균)는 양봉이 취미인 물류센터 직원 테디(제시 플레먼스)로 바뀌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납치 대상의 성별이 바뀐 점이다. 주가 조작 등 비리를 일삼는 중년 남성 기업가 만식(백윤식)이 바이오 기업의 젊고 유능한 여성 CEO 미셸(엠마 스톤)로 설정됐다.

원작이 기발하고 독창적인 스토리 위에서 B급 유머와 기괴한 상상력을 펼쳐냈다면, ‘부고니아’는 한층 정제된 느낌의 블랙코미디다. 후반부에선 장엄한 오케스트라 음악을 배경으로 묵시록적 분위기마저 자아낸다. 사회 권력층과 정치 활동가에 대한 반감을 담은 테디와 미셸의 대화는 철학적 여운을 남긴다.

테디가 벌이 사라지는 ‘벌집 군집 붕괴 현상’(CCD)을 외계인 지구 침공의 대표적 징후로 여기는 모습도 상징적이다. 생태계에 필수 역할을 하는 벌은 곧 생명의 재생을 의미한다. ‘부고니아’는 죽은 소의 사체에서 벌이 생겨난다고 여긴 고대의 잘못된 믿음을 뜻하는 그리스어다.

극 후반 극적 반전이 휘몰아치면서 영화는 전쟁으로 동족을 말살하고 자연 파괴에도 거리낌 없는 인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다. 다만 완전한 파멸이라는 원작 결말 대신 일말의 희망을 남겨두기로 한다. 어딘가에서 벌이 다시 태어나 병든 지구를 회복시키길 바라는 듯이. 러닝타임 118분, 청소년 관람불가.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