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대통령의 4일 국회 시정연설은 국민의힘의 보이콧 속에서 반쪽짜리로 진행됐다. 특검의 추경호 전 원내대표 구속영장 청구에 반발한 야당 의원들은 대통령 도착에 맞춰 검은 마스크를 착용한 채 시위를 벌였고, 연설 시간에 따로 의원총회를 열었다. 내년 예산을 논해야 하는 이날, 험한 말이 많이 나왔다. 대통령을 향해 “범죄자 왔다”는 고함이 터졌으며,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의총에서 “이제 전쟁이다. 이재명 정권을 끌어내려야 한다”고 했다.
이런 장면은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첫 예산안 시정연설과 판박이였다. 당시엔 더불어민주당이 검찰의 이재명 대표 수사에 반발해 헌정 사상 처음 시정연설을 보이콧했다. 여야만 바뀌었을 뿐 파행의 원인과 방식이, 로텐더홀에서 검은 마스크를 쓰고 시위한 것까지 베낀 듯 같았다. 상대를 비난하며 꺼낸 “민생 팽개친 정쟁”(민주당) “야당 탄압”(국힘)도 3년 전 자기가 들었던 말이다. 입장만 바꿔 똑같은 상황을 연출한 이날의 한국 정치는 마치 SF 소설의 ‘평행 세계’처럼 기이했다.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등 슈퍼 외교 주간이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다. 정상적인 정치라면 대통령이 여야 지도부와 만나 외교 성과를 설명하고 후속조치에 협조를 구하는 자리가 마련돼야 한다. 특히 관세 협상을 매듭지으려면 입법 뒷받침이 필수적인 상황에서 거꾸로 시정연설 보이콧의 극한 충돌이 벌어졌다. 나라의 경제·안보가 걸린 외교 문제, 민생이 걸린 예산 문제 앞에서도 여야의 싸움판 정치는 계속되고 있다.
정치적 사안에 하락하고 경제·외교 성과에 상승하는 이 대통령 지지율이 말해주듯 국민의 시선은 이미 계엄을 넘어 미래를 향해 있는데, 여야는 그 난국을 불렀던 3년 전 대결 정치에서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헌정 사상 두 번째 시정연설 보이콧을 양당 모두 스스로 돌아보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특검 수사가 무리하다면 사법부에서 걸러질 것이다. 야당은 사법부에 판단을 맡기고, 여당은 대통령실과도 갈등을 빚는 사법 장악 및 왜곡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