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아파트값 폭등… 30년 만에 버블 정점 뛰어넘어

입력 2025-11-08 00:05
지난 5월 일본 도쿄 시부야구 에비스역 인근 고층 건물에서 한 여성이 도심 전경을 바라보는 모습. 시부야구를 포함한 ‘도쿄 23구’의 올해 상반기 신축 아파트 평균가는 전년 대비 20.4% 급등했다. 신화뉴시스

일본 도쿄에 인접한 사이타마현 남동부 소카의 신축 아파트(콘도미니엄) 단지는 주말마다 ‘부동산 임장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들 대부분은 육아에 적합한 환경에서 도쿄로 출퇴근이 가능한 집을 찾는 30대 부부다. 이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는 5000만엔(4억6400만원) 안팎으로, 올해 1억엔 선을 뚫고 올라간 도쿄 평균 집값의 절반 수준이다. 스미토모부동산은 지난 5월 완공한 이 아파트의 입주자용 홈페이지에 “넓은 공간을 점유하고 아이를 키우기 좋은 환경이며 도보로 11분 거리에 도쿄와 닿는 전철역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 아파트 주변 땅값은 전년 대비 6.7% 올랐는데, 이는 사이타마현 평균 토지 가격 상승률(1.5%)의 4배가 넘는다.

코로나19 팬데믹 전인 2019년 도쿄 시나가와구에서 오래된 아파트(맨션)를 구입해 거주해온 40세 일본인 남성 회사원 A씨는 자녀가 청소년으로 자라면서 더 넓은 집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나가와구를 포함한 ‘도쿄 23구’(도쿄도 중심부 23개 특별구)의 집값은 2020년대 들어 가파르게 상승했고, A씨는 이제 도쿄 남쪽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에서 단독주택을 알아보고 있다. A씨는 3일 통화에서 “앞으로 몇 년을 더 기다려도 도쿄 집값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며 “도쿄에서 일하려면 수도권을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강남 3구 해당하는 도쿄 23구

사이타마현이나 가나가와현과 같은 도쿄 근교의 부동산 수요가 늘어난 배경에는 도쿄 23구에 진입하려는 ‘파워 커플’이 있다. 일본에서 파워 커플은 연간 합산 1000만~1500만엔(9300만~1억4000만원)을 버는 맞벌이 부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보통은 수도권에 거주하는 30~40대 고소득 직장인 부부를 뜻한다. 파워 커플이 선호하는 도쿄 23구는 서울의 ‘강남 3구’처럼 단순한 행정구역명에 그치지 않고 일본에서 부동산 상급지를 상징하는 표현이 됐다.

도쿄 23구에 이미 거주하거나 신규 입주를 기다리는 파워 커플은 일본 수도권 부동산 시장을 가장 탄탄하게 지탱하는 계층이다. 일본에서 단독주택 선호도는 여전히 높지만, 파워 커플의 시선은 단지형 콘도미니엄이나 타워 맨션(초고층 주상복합) 같은 아파트의 신축 분양 물량에 쏠려 있다. 한국과 같은 ‘수도권 신축 아파트’ 선호가 일본의 젊은 고소득층 기혼자들을 중심으로 높아진 것이다.

일본 수도권 신축 아파트 시장은 ‘잃어버린 30년’을 떨쳐낸 지 오래다. 일본 부동산경제연구소가 1973년부터 2022년까지 50년 주택 시장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수도권 신축 아파트 평균 가격은 2021년 6260만엔(5억8100만원)을 기록해 버블 붕괴가 시작된 1990년의 정점(6123만엔)을 31년 만에 넘어섰다. 도쿄 23구의 상승세는 수도권 평균보다 가파르다. 최근 부동산경제연구소가 발표한 지난 4~9월 도쿄 23구 신축 아파트 평균가는 1억3309만엔(12억3500만원)으로 1년 전보다 20.4% 급등했다.

일본 부동산 시장의 강세장은 주로 도쿄와 오사카에 집중됐지만 지방에서도 하락 일변도였던 방향이 뒤바뀔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일본 국토교통성이 매년 두 차례 발표하는 기준지가(공시지가)에서 올해 상반기 지방권 주택 가격은 29년 연속 하락 추세를 깨고 보합세로 전환됐다. 교도통신은 “견조한 주택 수요와 외국인 관광객 증가에 따른 호텔 신설이 지방권 부동산 보합세에 기여했다”며 “도쿄 아파트와 홋카이도 리조트를 중심으로 외국인 투자가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엔저에 싱가포르 자본도 몰려

일본 부동산 강세장을 이끄는 또 하나의 요인은 엔저에 따른 외자 유입이다. 올해 들어선 싱가포르 투자자들이 도쿄와 오사카 부동산을 집중적으로 사들이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는 “일본 부동산에 대한 싱가포르 자본의 관심이 전례 없이 높아졌다”며 “매력적인 임대 수익률과 관광업 호황, 엔화 약세가 빚어낸 결과”라고 분석했다. 국제 부동산 투자사 FM인베스트먼트의 일본 투자에서 싱가포르 자금 비중은 지난해 30%에서 올해 50%로 급증했다고 SCMP는 전했다.

외자까지 몰려드는 도쿄에는 이제 신규 주택을 지을 땅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부동산 강세가 멈추지 않는 수도권에서 토지 부족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며 “2015년 대비 지난해 수도권의 신규 주택 분양 물량 감소율은 43%로 전국 평균(24%)을 크게 상회했다. 도쿄 23구의 경우 55%를 기록했다”고 전했다. 신규 분양 물량 감소는 결국 주택 공급난 심화로 이어질 수 있다. 미쓰비시UFJ신탁은행 관계자는 “호텔 등 신규 상업시설도 도쿄에서 용지 확보 경쟁에 뛰어들었다”며 “주택 건설사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1일 취임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는 새 내각에 ‘외국인과의 질서 있는 공생사회 추진실’을 신설하고 외국인의 부동산 취득 제한에 나섰다. 다만 아베노믹스를 계승하는 다카이치 총리가 엔저 기조를 유지하는 한 외자는 일본 부동산 시장에 계속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은행이 지난달 30일 다카이치 내각 출범 이후 첫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함에 따라 엔화 약세 흐름이 이어졌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