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깐부의 정치학

입력 2025-11-05 00:34

예상 못한 젠슨 황 치맥회동
‘정’ ‘인심’ 제대로 작동하며
한국 기업 향한 정서 보여줘

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성공리에 마무리됐다는 평가는 여야라는 정치 지형을 막론하고 공통된 견해인 듯하다. 여러 숙제가 남았지만 미국과의 관세 협상에 나름 선방했고, 중국 및 일본과의 해묵고 껄끄러운 관계도 관리 가능한 수준으로 이끌었다는 평가 역시 대체적 여론으로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APEC 정상회의 기간 중 이목을 끌었던 건 기업가들의 회동 이벤트일 것이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와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과의 치맥 회동이 그렇다.

화제의 중심에 오른 건 치맥 회동의 예상할 수 있었던 프로세스를 넘어선 의외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저녁 시간에 치킨과 맥주를 즐기는 치킨 전문점에서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는 거물급 CEO 셋이 회동했다는 것 자체도 화제인데, 여기에 젠슨 황이 보인 소박한 모습과 ‘깐부’라는 키워드의 등장은 주목할 만한 관전 요소로 평가받는다.

계산되지 않은 소탈함과 보편적 정서의 결합이란 주제가 이번 기업가 만남의 중심 이슈라고 해도 이것은 우연성의 차원에서만 해석되지 않는다. 잘 알려지지 않은 민간 상점을 자주 찾던 젠슨 황의 서민 행보가 새삼스러운 것도 아니다. 주목해야 하는 건 깐부라는 단어 선정에 있다. 깐부라는 상표를 가진 치킨집에서의 회동은 일회적 사건이나 서민적 만남으로만 가치가 머무르지 않았다. 깐부가 거론된 만남 자체가 주식을 폭등시키고, 한국 반도체 시장의 긍정적 신호로 작용했다. 결국 단어 자체가 기획된 것인데, 이는 한국 기업과 더 나아가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젠슨 황 측의 정서가 녹아든 결과로 봐야 할 것이다.

깐부란 단어가 글로벌 사회에서 유명해진 것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의 힘이 막중하다. 오징어 게임은 무한경쟁이 막장으로 내몰리는 21세기 글로벌 자본주의 사회의 폐해를 극단적이고 끔찍한 방법으로 여과 없이 묘사하면서도 한국 전통의 놀이와 문화, 거기에 덧입혀진 비인간적 극단 상황에서도 연대와 환대의 본능을 숨기지 않는 한국적 연대인 ‘정(情)’의 문화를 전반에 녹여냈다. 오징어 게임이 세계적 인기몰이를 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바로 이 환대와 정의 키워드가 강하게 작동했다. 내가 살기 위해 다른 이를 희생시켜야 하는 비정한 사회 속에서도 사람다움을 이야기한 메시지가 역설적인 공감을 일으켰고, 그 공감의 중심에 친한 친구와 동반자를 뜻하는 깐부가 자리 잡았다.

각국 정상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엔 정치적 해석의 여지가 다분하다. 말 한마디, 손짓과 표정 하나에도 정치적 메시지가 담긴 것이다. 기업가의 회동 역시 겉으로는 소박한 모습과 즉흥적 퍼포먼스로 채워져 있어도 그 상황 자체가 가져오는 경제적 파장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맥락에서 세계적 혁신기업 CEO인 젠슨 황과 국내 유수 대기업 회장들의 회동이 깐부라는 단어로 묶인 것이 나름의 메시지를 갖는데, 이제는 한국적 환대와 연대의 가능성이 세계적 신뢰 기준으로 격상했음을 뜻하진 않을까 싶다. 시민들과 어울려 치맥을 즐기고, 시민들에게 한국 치킨의 맛을 찬미하며 같이 먹을 것을 권한 행동이 보여주기식 이벤트에 머문 것이 아니란 사실이 확실하다면 그 행위의 앞뒤 맥락을 자연스럽게 휘덮는 건 과거엔 비효율적으로 취급되던 손님이나 오래된 벗을 맞이할 때 나누던 맥주 한잔의 여유, 이웃을 환대하고 내 식구처럼 대하는 깐부의 온정이 기업가의 메시지 전면에 대두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계산적이고 정량적으로만 접근하던 외교관계로 인해 찾아온 공허와 허기를 넉넉하게 채워주는 정과 인심, 이른바 깐부의 정치학이 제대로 작동된 순간이었다.

깐부의 정치학은 계산된 목적 달성을 우선하는 것이 아닌 내 친구, 내 이웃을 향한 무조건적 환대의 손 건넴이 앞서는 한국적 정서의 발로다. 이러한 한국적 정이 더욱 활성화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본다.

주원규
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