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유적 스톤헨지처럼 빙 둘러져 세워진 것은 나무였다. 흰색 칠이 돼 있지만 나무의 질감이 드러났다. 게다가 그냥 나무가 아니라 불에 타 숯덩이가 된 나무라는 걸 껍질이 사라져 매끈해진 표면으로 느낄 수 있다.
칠순의 정현(69) 조각가가 서울 종로구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개인전 ‘그의 겹쳐진 순간들’을 하고 있다. 1991년부터 2025년에 걸쳐 제작된 조각과 드로잉 총 84점이 공개됐다. 찰나의 감정을 중시해 흙으로 형태를 빚은 뒤 묵직한 냉동 칼로 내리친 조각, 휙 던지는 감정을 붙잡듯 순간을 담은 드로잉이 서로 조응하듯 전시돼 있는 게 먼저 눈에 들어온다.
작가 작업세계에서 새로운 변화를 보여주는 건 위층 전시장에 나온 이 숯 조각이다. 홍익대 교수를 지낸 그는 철로 건설에 사용되는 폐침목, 나무 전신주, 아스팔트, 제철소 파쇄공 등 산업용 자재를 가지고 작업해 온 것으로 유명했다. 그러던 그가 생태적인 제재에 눈을 뜬 건 2019년 강원도 고성 산불이 계기였다. 동료 작가들과 고성을 수차례 찾아 타다 남아 숯덩이가 된 나무를 수습했다.
숯 작업은 2020년 김종영미술관 그룹전 ‘새벽의 검은 우유’전에 첫 선을 보인 뒤 2022년 성북구립미술관 개인전에도 나왔다. 성북구립미술관 전시 때는 소생의 염원을 담아 검은 나무에 반짝이는 금속을 박았다. 이제 PKM갤러리 전시에는 흰 분칠이 돼 나왔다. 작가는 “생명을 다한 나무를 화장(火葬) 하듯 불로 정성스레 다듬고, 고인의 얼굴을 화장(化粧)하듯 흰 분을 입혔다”고 말했다.
그런데 숯 조각은 보석도, 흰 분도 없이 타버린 숯이 된 나무 그 자체로 전달할 때 자연의 상처, 야생의 목소리가 가장 생생했다. 분칠로 인해 그 목소리조차 잠드는 것은 아닌가 안타까웠다.
글·사진=손영옥 미술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