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는 한·미 관세협상 타결, 한·중 관계 정상화 등의 성과가 있었지만 최대 낭보는 단연 엔비디아로부터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26만장을 확보한 일이다. GPU는 인공지능(AI)의 엔진 격인 핵심 자산이다. 정부는 2030년까지 GPU 5만장을 확보할 예정이었는데 다섯 배가 넘는 물량을 받게 되면서 단숨에 AI용 GPU 보유 세계 3위권에 올라설 전망이다. AI 산업 생태계를 구축할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정부는 각종 제도적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엔비디아 GPU는 미국 정부가 안보 차원에서 수출 통제를 하는 전략 물품이다. 따라서 이번 대량 공급은 한국 제조 AI의 잠재력을 감안한 한·미 AI 동맹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뒤처졌던 AI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소중한 물적 토대다. 이제 우리 내부의 역량 강화가 중요한 시점이지만 여건이 결코 녹록하지 않다.
당장 GPU 26만장을 가동할 때 드는 전력은 초대형 원자력발전소 1기가 1년 내내 생산하는 규모로, 중소도시 한 곳에 공급하는 수준이라 한다. 원전을 풀가동해도 모자랄 판에 정부는 설계 수명 만료를 이유로 멀쩡한 고리원전 2호기의 계속운전을 2년 반 이상 중단시키고 있다. 안전상 문제가 없다면 기한이 지난 원전도 오래 쓰는 게 AI 시대의 글로벌 추세다. 이를 외면하는 걸 넘어 정부는 날씨 변화에 따라 전력량이 들쭉날쭉인 재생에너지만 고집하고 있으니 시대착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재 부족도 큰 문제다. 미국과 중국은 매년 수천, 수만명의 AI 박사를 배출하는데 한국은 수백명 수준에 그친다. 여기에 이공계 석·박사급의 절반 가까이(43%)는 부실한 보상 등을 이유로 3년 내 해외 이직을 고려 중이다(한국은행 보고서). 첨단 GPU가 대량으로 들어온들 가동할 전기가 부족하고 이를 다루는 인력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특별법을 통해서라도 AI 인프라 확대와 인재 확보, 규제 완화의 길을 만들어야 한다. 진영 논리에 집착해 탈원전, 감(減)원전의 허상에 또다시 빠진다면 정부가 외치는 AI 3대 강국 도약은 헛된 꿈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