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안 교수의 질문하는 삶]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입력 2025-11-04 03:05

여러분 안녕하신가요. 4일 경기도 성남 만나교회(김병삼 목사)에서 열리는 ‘생애 주기 교육 콘퍼런스’ 오후 세션에 ‘죽음을 준비하는 삶’에 관한 토론이 있습니다. 이 모임에 참여하느라 생각하는 가운데 문득 사도 바울의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 개역 한글) 이 물음, 이 외침은 단순한 승리의 선언일까요. 아니면 죽음의 현실을 정면으로 마주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죽음 너머에서 솟아오른 생명의 빛을 본 이의 외침일까요.

철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존재의 비밀을 여는 열쇠로 보았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을 ‘죽음의 연습’이라 불렀습니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을 향해 사는 존재’로 이해하며 죽음이 삶에 고유한 의미를 부여한다고 봤습니다. 인간은 모든 가능성을 닫는 순간인 죽음 앞에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삶을 선택할지 스스로 물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자들은 지금도 말합니다. “메멘토 모리(죽음을 기억하라).” 죽음을 기억하는 것이 삶을 진지하게 사는 한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보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생명을 드러내는 문으로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지워 버린 기적이 아닙니다. 죽음을 통과해 생명의 깊이를 드러낸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어둠은 부활의 새벽을 품고 있었고 상처 입은 몸은 부활의 몸 안에서 빛으로 변했습니다. 부활은 죽음의 부정이 아니라 죽음을 통과한 생명의 변모입니다. 영원은 시간을 파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 스며들어 시간을 새롭게 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건 죽음의 한가운데서 생명을 보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시간과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유한한 삶의 끝이지만 영원의 관점에서 보면 부활의 생명이 이미 이 땅에 우리의 오늘 속에 스며 있습니다. 저는 이 시야를 ‘이중 시선’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한쪽 눈은 시간의 덧없음을 보지만 다른 눈은 그 시간 안에서 자라는 부활의 씨앗을 봅니다.

그렇다고 죽음의 아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사랑하는 이를 잃는 슬픔, 자신의 끝을 마주하는 두려움은 여전히 무겁습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은 고통을 지우기보다는 그 안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때 죽음은 단절이 아닌 통과이며, 상실은 파괴가 아닌 새로운 관계의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으로 새 생명을 열고 인간의 마지막 한계를 영원한 사랑과 소망으로 바꾸십니다.

이렇게 보면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는 바울의 외침은 절망의 부정이 아닌 사랑의 승리 선언입니다. 바울은 고통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매 맞고 갇히며 위협 속에 살았지만 이렇게 노래합니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에 삼킨 바 되리라.”(고전 15:54) 죽음이 인생의 문장에 ‘끝’이라고 써넣으려는 순간, 하나님은 그 자리에 새 생명으로 이어지는 문장을 곧장 시작하십니다.

이중 시선으로 노년의 삶을 다시 보면 모든 게 새롭게 보입니다. 짧은 시간은 헛되지 않은 귀한 선물이 되고, 낡아가는 몸은 부끄러움이 아닌 은혜의 자리가 됩니다. 삶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상처를 용서로 편견을 배움으로 바꿔 살아갑니다. 매일의 삶에서 작은 부활을 경험합니다. 사랑하고 용서하며 다시 일어설 때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시작됩니다.

부활은 먼 미래의 기적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사랑과 감사, 희망으로 오늘을 살아갈 때 세상은 부활의 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여전히 죽음은 남아 있지만 이제 그것은 마지막 단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새로운 존재로 들어서는 문이 됐습니다. 그 너머엔 더 넓은 생명의 공간이 열려 있습니다. 바울의 물음은 모두를 향한 초대입니다. 죽음을 피하지 말고 그 안에서 생명의 빛을 보라는 초대입니다. 그 빛을 품고 이 땅을 담대히 걸어가라는 초대입니다.

한동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