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병들어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미 다른 방법은 모두 써봤기에 야이로는 유대인으로서가 아니라 한 아이의 아빠로서 예수님께 도움을 요청하러 직접 갑니다. 사람을 보내지 않고 직접 와서 간청하는 야이로의 진심을 보고 예수님은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가는 도중 일이 생깁니다. 12년간 혈루병을 앓았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회복하는 사건입니다. 바삐 야이로의 집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굳이 가던 길을 멈추고 여인을 찾아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지 않아도 됐을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기어코 그 일을 했습니다. 야이로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입니다.
적잖은 이들이 여인의 고백과 간증으로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야이로는 달랐을 것입니다. 그 사이 아이가 숨을 거뒀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순간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었을까요. 예수님께 빨리 가자고 재촉하지 않은 자신이 얼마나 미웠을까요. 한참을 멈춰 여인의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이 얼마나 야속하고 싫었을까요. 어찌 보면 혈루병 여인의 기적으로 내 자녀가 골든타임을 놓쳤고 아비로서 임종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는 아빠입니다. 빨리 예수님을 모시지 못해 아이를 죽인 자신을 책망했을 것입니다. 내 입장과 사정을 앞세웠더라면 ‘아이를 살릴 수 있었을 텐데’ 하는 후회가 커졌을 것입니다. 주님께 ‘지금 더 급한 건 우리 집으로 가는 것’이라고 왜 말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향한 원망은 끝없이 이어집니다. 누군가를 배려하다가 소중한 자녀를 잃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다시는 이렇게 살지 않겠다고 마음먹게 됩니다.
예수님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야이로에게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고 하십니다. 아직 늦지 않았고 죽지 않았다고까지 합니다. 결과는 이미 우리가 모두 다 아는 대로입니다.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그렇다면 야이로는 혈루병 여인을 배려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혈루병 여인과 말씀을 나눈 예수님을 존중하고 배려한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당신을 대하는 방식으로 우리를 대하십니다.
아픈 아이가 회복되는 것보다 더 놀라운 일은 죽은 아이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야이로는 죽으면 기회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어도 여전히 기회가 있다는 걸 보여줍니다.
우리는 모두 죽음과 같은 인생의 문제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끝났다고 생각하는 그 지점에서 새로 시작합니다. 그 은혜는 내가 아무리 급해도 주님을 믿고 배려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우리는 모두 기다리기만 하면 나만 손해 보고 망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방식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님을 배려하는 사람에게 주님의 역전과 반전의 은혜가 임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원하는 결과를 주길 간절히 바라는지 모릅니다. 이것이 안 되면 ‘왜 하나님은 나를 배려하지 않고 나를 위하지 않는가’ 하면서 원망합니다. 돌아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배려하지 않은 셈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하지만 응답은 하나님이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응답하는 시간까지 낙심하지 말고 기다리는 게 우리가 할 일입니다. 모두에게 줘도 충분한 은혜가 그분께 있습니다. 함부로 마침표를 찍지 맙시다. 나의 끝에서 주님은 다시 시작하십니다.
구현우 목사 (위더처치)
◇위더처치(We, the Church)는 성도의 신앙을 책임지고 성도의 인생과 함께하며 함께 믿음의 경주를 함으로써 주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교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