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 반복해 마주하는 장면이 있다. 의사가 여러 차례에 걸쳐 설명하면 환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돌아설 때면 눈빛에 여전히 불안이 남아있다. 나는 이 불안이 의료 현장 한가운데 여전히 자리 잡고 있다고 느낀다.
환자는 더는 치료의 수동적 수혜자가 아니라 건강 여정을 함께 설계하는 동반자가 돼야 한다. 영국은 2021년부터 모든 진료 과정에서 환자와 의사가 함께 치료 방침을 결정하도록 제도화했다. 미국은 한 발 더 나가 의사 진료 기록과 임상 노트를 환자가 스마트폰으로 직접 열람할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했다.
우리나라에선 2017년부터 환자 경험 평가가 도입됐다. 환자와 얼마나 충분히 소통했는지, 치료 과정에 참여할 기회를 얻었는지를 국가 차원에서 점검한다. 보건복지부의 ‘마이헬스웨이’ 사업은 환자가 자기 건강 데이터를 직접 관리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한시 허용된 원격진료는 현재 만성질환 관리와 재진 중심으로 제도화가 논의되고 있다.
이 모든 변화는 환자의 권리를 확장하는 동시에 그만큼 책임을 요구한다. 실제로 진료실에서 ‘참여의 그늘’을 자주 목격한다. 환자가 스스로 찾아본 정보와 주장을 지나치게 앞세우는 경우다. 인터넷 글이나 일부 연구 결과를 절대적인 해답처럼 붙잡고 의사의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기도 한다. 원하는 진단이나 처방을 얻기 위해 여러 병원을 옮겨 다니는 ‘의료 쇼핑’도 흔하다.
참여형 의학에 있어 환자는 무엇보다 정보에 대한 겸손이 필요하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논문 한 편이나 블로그 글 하나가 내 몸 전체의 해답이 될 순 없다. 연구의 대상과 내 상황은 다를 수 있다. 또 수많은 변수가 치료 결과에 영향을 미친다. 환자가 찾아본 정보를 의료진과 함께 검증하며 내 몸과 상황에 맞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아울러 치료 결정에 있어선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한다. 치료는 효과와 부작용, 비용과 시간, 삶의 방식이 얽힌 복잡한 선택이다. 생존 기간을 늘리는 게 가장 중요한지,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것이 더 절실한지, 일을 계속 이어가는 것이 우선인지, 신앙·가치의 균형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지…. 환자가 자기 우선순위를 솔직히 드러낼 때 의사는 이를 근거와 연결해 현실적인 치료 방안을 제시할 수 있다.
데이터를 대하는 태도도 중요하다. 혈압과 혈당, 수면과 운동량 같은 수치는 몸을 보여주는 유용한 언어지만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수치가 좋지 않다고 낙담하거나 반대로 좋다고 방심하는 것 모두 위험하다. 데이터는 방향을 알려 줄 뿐이고 그 길을 따라가는 선택은 결국 사람의 몫이다. 데이터를 꾸준히 기록하고 추세를 함께 해석하며 변화의 이유를 찾아가는 습관이 필요하다.
진료실에서의 태도도 달라져야 한다. 질문을 효과적으로 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 치료의 기대 효과와 주요 부작용 및 그 확률, 다른 질환이나 복용 중인 약과 충돌 여부, 치료 시기 정도만 질문해도 진료의 질이 달라진다. 대신 진료가 끝나면 의사의 설명을 바로 기록해둬야 한다.
개인 참여형 의학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은 병원 밖의 일상이다. 식사와 수면, 운동과 스트레스 관리, 인간관계와 삶의 의미가 치료의 성패를 좌우한다. ‘일주일 세 번 운동하기’라는 추상적 목표보다 ‘화·목·토 저녁에 집 앞 공원 두 바퀴 걷기’처럼 구체적인 계획이 효과적이다.
무엇보다 환자가 잊지 말아야 할 건 의사에 대한 신뢰이다. 의사는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며 질병의 패턴을 축적해 온 사람이다. 환자는 자신의 삶과 가치, 생활 맥락을 가장 잘 알고 있다. 두 전문성이 만나야 가장 안전하고 현실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 의료의 길에서 환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태도는 ‘믿음’이다. 의사는 환자의 삶과 의학적 지식을 연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다. 신뢰 없이는 어떤 치료도 끝까지 이어질 수 없다.
개인 참여형 의학 시대에선 의사와 환자가 서로 신뢰의 끈을 붙잡고 있는 게 중요하다. 이럴 때 우리는 더 안전한 길에 바로 설 수 있다.
선한목자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