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재덕 (22) 공식 모델 된 대회 재도전, 마스터스 베테랑 부문 우승

입력 2025-11-03 03:07
심재덕 선수가 2009년 싱가포르 마라톤 공식 포스터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포스터엔 2008년 싱가포르 마라톤 대회에서 결승선을 통과하는 심 선수의 모습이 담겼다.

싱가포르 마라톤은 1982년에 시작된 동남아 최대의 달리기 대회다. 세월이 흐르며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선수와 자원봉사자 10만명이 참여하는 축제로 성장했다. 도시 전체가 응원의 함성으로 들썩인다.

2008년 12월 나는 GROE(the Greatest Race On Earth) 한국 대표로 그 무대에 서기 위해 싱가포르로 향했다. 그곳은 밤에도 숨이 막힐 만큼 더웠다. 한국 장마철 같은 공기. 습도 80% 기온 32도. 달리기도 전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괜히 온 게 아닐까 겁이 났지만 즐겨보기로 마음을 다졌다.

GROE는 2005년부터 시작된 이어달리기 방식의 국제 마라톤 이벤트로 각국을 대표하는 4명의 선수가 케냐 나이로비, 인도 뭄바이, 홍콩 침사추이, 싱가포르 중 한 곳을 달린다. 나는 싱가포르 대회를 맡았다.

새벽 5시 30분, 총성이 울렸다. 무엇이 이 꼭두새벽에 이 많은 사람을 거리로 불러낸 걸까. 누구는 기록을 위해, 누구는 자신을 이기기 위해, 또 누구는 단지 이 순간을 사랑해서 뛰는 것이다. 도시는 뜨거운 심장의 리듬에 맞춰 흔들렸다.

달리기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권자가 속출했다. 온도와 습도는 인간의 체력을 순식간에 녹여버렸고 그 속에서 나는 오히려 차분해졌다. 인내하며 뛰다 보니 어느덧 골인 지점에 가까워졌다. 결승점 아치의 시계가 2시간39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40분 이내로 들어가겠다는 생각 하나로 온 힘을 짜내 결승선을 통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만세를 불렀다. 나는 전체 엘리트 29위, GROE에 나선 22개국 중 9위로 예상외 좋은 성과를 거뒀다.

대회 1년 뒤. 지인이 내게 링크 하나를 보내주었다. 클릭해보니 싱가포르 국제 마라톤 홍보 포스터와 대회 배너 사진이 있었다. 두 주먹을 하늘로 뻗은 세상을 다 가진 듯 평화로운 내 모습이었다. 2008년의 내가 2009년 대회 공식 모델이 돼 있었다.

모델이 된 김에 다시 대회에 나섰다. 이번엔 1만7500명이 새벽어둠을 박차고 빌딩 숲속으로 뛰어들었다. 컨디션은 최상. 10㎞부터 선두로 달렸다. 결승선이 가까워질수록 내 얼굴이 담긴 현수막이 사방에서 펄럭였다. 나는 또 한 번 결승선을 통과했다.

배너 모델이자 마스터스 베테랑 부문 우승자가 돼 기쁨은 두 배였다. 그날의 환호와 빛, 그리고 뜨거운 땀은 내 인생 가장 순도 높은 기쁨이었다. 몇 해가 지나 2013년 11월 8일 자 뉴욕타임스 아시아판에 내 이야기가 실렸다. 아마추어 러너가 세계 언론에 오를 줄 누가 알았을까. 이후 국내는 물론이고 영국 BBC, 노르웨이 매체에서 차례로 나의 달리기 인생을 조명해 줬다.

감자를 캐듯 한 줄기 삶을 들어 올리면 크고 작은 결실이 함께 따라온다. 굵은 감자도, 작고 미숙한 감자도 있다. 때로는 줄기에서 떨어져 흙 속에 남은 알이 나중에 가장 귀한 선물로 돌아오기도 한다. 내게 달리기가 그렇다. 어떤 대회에서는 우승했고 어떤 대회에서는 완주조차 못 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다 내 삶의 수확이었다. 나는 오늘도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은혜의 열매를 맺으며 최선을 다해 달려가고 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