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경주의 지난주는 말 그대로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슈퍼 위크였다. 무엇보다 통상국가인 한국 입장에서는 미국과의 관세협상이 어떻게 전개될지 초미의 관심사였다. 기존 국제무역 원리와 질서, 관례를 무시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식 압박에 전 세계가 전전긍긍하고, 유럽연합(EU)과 일본마저 미국식 강압 논리에 굴복하는 상황에서 ‘국익을 손상하는 협상은 하지 않겠다’는 이재명 대통령표 실용주의의 시험대였다.
한·미 양국은 정상회담을 계기로 3500억 달러 대미 투자금을 포함한 무역·투자협상에 합의했다. 그동안 현금투자 비율과 투자처, 원금 회수와 이익 분배 등을 놓고 줄다리기를 하면서 타결이 쉽지 않아 보였으나 현금투자를 연 200억 달러 상한선에 10년간 2000억 달러로 조정하고, 나머지는 조선업 협력을 위한 마스가(MASGA) 프로젝트를 위해 1500억 달러 투자에 합의해 첫 번째 허들을 넘었다.
일단 협상 결과는 경제 불확실성을 해소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상한 기준점인 3500억 달러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이 ‘국내적 승리’로 포장할 수 있도록 총액 베이스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면서 연간 투자 상한을 200억 달러로 제한해 한국 외환시장의 충격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방편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이 다시 존중받고 있는 것’이라는 만족감을 표시했다는 점에서 이상한 기준점이지만 협상 자체는 선전했다.
특히 이 대통령은 총액 베이스에서 양보 불가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을 반영해주는 대신 공개된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안보적 숙원 사업인 핵추진 잠수함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관세협상과 안보 이슈를 연계하는 ‘트럼프 스타일’을 겨냥한 승부수였다. 여기에는 한국의 자주국방 강화 기조를 강조하면서 북·중 위협을 ‘대신 견제’해 미국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우회적 메시지가 포함돼 있음도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중국의 우려와 대응이 한·중 관계의 또 다른 숙제가 될 수 있음도 부인하기 어렵다.
결국 한국은 관세협상에서 세부 내역을 조정하면서 안보와 연계하는 묘수를 찾아낸 것이다. 트럼프식 협상이 다 그렇지만 어느 것도 문서화되지 않았기에 최종 사인이 이뤄질 때까지 수많은 허들이 도사리고 있는 게 문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이 나오는 것도 이 이유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핵연료 제공이 아닌 한국의 핵추진 잠수함의 건조를 한화 필리조선소에서 진행해야 한다고 한 트럼프 대통령의 의도도 살펴봐야 하고,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이나 미국 내 핵비확산 기조, 중국의 반발 등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한·미 관세협상이나 핵추진 잠수함에 대한 논의는 타결이 된 게 아니다. 일반적으로 양자협상은 협의와 합의, 그리고 최종적으로 타결의 과정으로 일단락된다. 이 점에서 보면 양국 관세협상은 합의 수준이며 핵추진 잠수함은 협의 시작 단계다. 이를 반영하듯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은 한국이 강조한 반도체 분야 합의를 부정했고, 농산물 시장 개방은 지켜냈다는 한국 주장과 달리 한국이 100% 시장 개방에 합의했다고 발표해 극단의 차이를 보였다. 향후 험로가 예상되는 대목이다.
당연히 아쉬운 점도 있다. 이번 회담이 무역 합의 등 지나치게 ‘거래’적 요소에 집중한 나머지 한국의 핵심적 이익인 안보 상황에 대한 포괄적 전략 조율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관세협상은 물론 핵추진 잠수함 문제, 그리고 안보전략 조율 등 본격적인 한·미 협상이 이제부터 시작인 이유다.
강준영 한국외국어대 국제전략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