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논단] AI 복지행정 ‘신청주의’ 그늘을 지운다

입력 2025-11-03 00:32

과거 신청해야 받는 복지 혜택
정부·지자체, 심사만 하면 끝

이제는 ‘권리로 통지받는 급여’
자격 갖추면 당연히 받는
AI와 행정 데이터 연계 시스템

분배의 기술 넘는 존엄의 재구성
품격 있는 복지 행정 만들어야

최근 이재명 대통령은 신청해야만 지원받는 ‘복지 신청주의’를 비판하고, 수급자격 충족자에게 권리를 자동 지급하는 ‘자동지급제’로의 전환을 주문했다. ‘신청→심사’가 기본인 체계에서 국가가 먼저 권리를 사전통지하고 당사자가 동의하면 곧바로 지급하는 구조로 바꾸자는 것이다. 표면적으론 신청이 자율성을 보장하는 절차처럼 보이지만 신청주의에는 미수급(non-take-up), 낙인(stigma), 행정비용(administrative burden)이라는 세 가지 비용이 따른다. 미수급은 제도의 목표달성을 막고, 낙인은 취약가구를 숨게 하며, 행정비용은 공무원과 당사자 모두의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시킨다.

반면 자동지급은 설계 원리상 이 세 비용을 함께 낮춘다. 인공지능(AI)과 행정데이터 연계를 통해 출생, 연령 도달, 사망, 은퇴 등 생애사건 트리거가 발생하거나 법정 수급요건이 확인되면 신청 없이 수급권을 기본값(default)으로 부여하고 사전고지 원클릭 수락·거부(옵트아웃)를 보장한다. 정보·시간·심리 비용이 큰 집단일수록 미신청 위험이 커지는 만큼 자동지급은 수급 격차를 줄이고 동일 상황, 동일 처우를 강화한다. ‘손을 들어야 받는 급여’에서 ‘권리로 통지받는 급여’로 전환하면 자존감 손상과 수치심 같은 보이지 않는 비용도 감소한다. 동시에 정부가 수급요건 확인에 대한 행정적 책임을 더 크게 지는 구조로 옮겨간다.

자동지급은 선택권을 빼앗지 않는다. 오히려 권리 행사에 드는 거래비용을 낮추고, 동의절차와 옵트아웃 경로를 명시해 형식적 자율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실질적 자율성을 넓힌다. 사회권은 ‘법전 속 권리’가 아니라 장벽 없이 행사 가능한 권리여야 한다는 T H 마셜의 시민권 프레임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길이다.

국제적 동향도 유사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2024년 보고서들에서 디지털 기술·데이터 결합과 사전안내·자동심사를 통해 사회보장 접근을 현대화하고, AI를 최저소득·실업부조에 도입해 선별 정확도와 행정효율을 높여 비수급을 줄이자고 제안했다.

그렇다면 왜 한국의 복지급여는 ‘신청주의’를 유지해 왔을까. 첫째, 과오지급, 부정수급을 막으려는 신중주의 문화가 강했다. 둘째, 개별법에 새겨진 신청 전제의 절차와 그에 맞춰진 심사 관행이 지속됐다. 셋째, 정부부처·지방자치단체로 나뉜 데이터, 예산, 책임의 분절성이 직권결정을 주저케 했다. 이 세 가지가 겹치며 “맞춤형 지원을 지향하지만 자동지급은 불안하다”는 제도적 관성을 낳았다.

그러나 기술·법제 인프라가 뒷받침되면 자동지급은 충분히 가능하다. 기술 측면에서 한국은 이미 행복e음, 복지멤버십, 보조금24, 국민비서 등 기반을 갖췄다. 이를 활용해 안내→간주신청→자동지급으로 단계 전환이 가능하다. 보편급여는 사전통지 후 직권결정으로, 선별급여는 동의 기반 직권보완과 사후확인을 결합해 설계하면 된다. 특히 행복e음은 170여개 사업의 자격·이력을 통합 관리하며 지자체 집행을 지원하는 행정 백엔드로 작동하고, 공공데이터 결합을 통해 복지 사각지대 발굴도 이미 가동 중이다. 보조금24와 국민비서는 개인 맞춤 안내·알림으로 ‘놓치는 급여’를 줄이는 자동화 전(前) 단계를 수행한다. 복지멤버십은 소득, 재산, 가구 정보를 분석해 가능성 높은 급여(128종)를 자동추천 중이다. 이 모두가 자동지급의 실무적 발판이다.

법제 측면에서는 개별법의 신청조항을 직권결정 또는 간주신청으로 바꾸는 정비가 핵심이다. 최소 요건으로 사전통지, 옵트아웃, 이의제기를 보장하고 빅브러더 우려를 제어하기 위해 데이터 최소수집, 목적제한, 열람·정정권을 명문화해야 한다. 설명가능성(규칙·모형 공개), 사람 심사 백업, 오·과지급 구제절차의 공정성과 오류 책임의 명문화도 뒤따라야 한다.

AI 기반 복지행정 혁신은 자동급여와 저마찰 선별로 절차 비용을 줄이고, 자기방임 대상자에 대한 전문개입을 강화해 권리의 실효성과 관계의 밀도를 높일 수 있다. 목표는 만나지 않아도 될 일은 기술로 처리하고 꼭 만나야 할 사람에게 더 깊이 시간과 자원을 쓰게 하는 것이다. 자동급여는 출발점에 불과하며, 전문개입이 삶의 변곡점을 만들 때 복지행정은 분배의 기술을 넘어 존엄을 재구성하는 기술이 된다. 정책의 품격은 가장 도달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얼마나 정확하고 따뜻하게 닿는가로 판가름 난다. AI는 그 길을 넓히는 인프라다.

석재은 한림대 사회복지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