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 AI의 두 번째 진화

입력 2025-11-01 00:39

2014년에 1000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인터스텔라’에는 여타 공상과학(SF) 영화에서 보기 힘든 인공지능(AI) 로봇이 등장한다.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말하지만 외형은 투박하기 그지없다. 금속으로 만든 커다란 상자 같은 모습인데, 기다란 직육면체 기둥 4개가 이어져 있는 구조다. 각 블록을 제각기 다양하게 움직일 수 있어 다리를 엇갈려 걷는 것처럼 블록을 분절해서 이동한다. 물건을 들어올리거나 만질 때에는 블록 일부를 더 세밀하게 쪼개 손으로 활용할 수 있다. 검은색 디스플레이가 달려 있긴 하지만 ‘얼굴’이라기보다는 작동 시 불빛이 들어오는 스크린에 가깝다.

AI 로봇이라면 인간의 외형을 따라 하거나, 적어도 인간과 비슷한 신체 구조를 가지고 있는 로봇을 먼저 떠올렸던 내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극중에서 로봇이 인간을 구하기 위해 몸을 풍차처럼 회전하면서 달려가는 장면은 지금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은 이러한 디자인에 대해 “로봇의 전형적인 개념에서 벗어나 더 현실적인 방식으로 로봇을 다루고 싶었다”고 밝혔다. 인간과 대비되어 오로지 목적과 기능에 초점을 맞춘 로봇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감독이 의도한 바는 아니겠지만 인터스텔라 속 로봇은 오늘날 이야기하는 ‘피지컬 AI(Physical AI)’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피지컬 AI는 인간이 활동하는 물리적인 세계와 직접 상호작용하며 움직이는 AI를 말한다. 휴머노이드 로봇, 자율주행 자동차 등이 대표적이다. 인공지능이 사람의 두뇌에 해당한다면, 피지컬 AI는 두뇌가 들어있는 몸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정해진 작업만 수행하는 자동화 로봇과 달리 피지컬 AI는 주변 환경과 사물을 인식하고, 어떤 강도로 물건을 쥐거나 만져야 하는지 판단하고, 목적에 맞게 생각해서 행동한다. 챗GPT 같은 생성형 AI는 디지털 세상에서만 작동하지만, 피지컬 AI는 예측 불가능한 현실 세계에서 인간과 공존하고 협업한다. 카메라와 센서 등으로 구성된 정밀한 몸체는 얼굴이 2개이든 다리가 4개이든 상관없다. 인간 대신 불을 끄러 달려가는 화재진압 로봇처럼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는 데 최적화된 설계가 더 중요하다.

‘AI 황제’라고 불리는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올해 초 AI의 다음 발전 단계가 피지컬 AI라고 선언했다. AI 발전 속도가 전례 없이 빠르며, 공장과 물류센터 등은 10년 안에 AI 기반으로 자동화될 것이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실제 테슬라와 현대자동차는 자체 휴머노이드 로봇 ‘옵티머스’와 ‘아틀라스’를 연내 제조 공장에 투입하겠다고 밝히고 상용화를 추진 중이다. 우리 정부도 로봇, 자동차, 선박 등 7대 분야에 AI를 융합해 피지컬 AI 1등 국가로 도약하겠다며 향후 5년간 6조원을 투입할 예정이다.

돌이켜보면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사람과 자연스럽게 소통하는 AI가 이렇게 빠르게 일상에 침투할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데이터 분석업체 와이즈앱·리테일에 따르면 국내 챗GPT 월간 사용자는 2024년 8월 기준 407만명이었는데, 올해 8월의 월간 사용자는 5배 가까이 늘어난 2031만으로 집계됐다. 이는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의 40% 수준이라고 한다.

챗GPT의 등장과 함께 재조명된 영화는 2013년 작품 ‘그녀(Her)’였다. 주인공이 몸이 없는 음성 AI 운영체제와 대화하며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다. 영화 속 이야기가 현실이 됐다며 놀라워하는 사이, 텍스트와 이미지에 특화된 생성형 AI를 넘어 산업 전반에는 스스로 사고해 문제를 해결하는 에이전틱 AI가 확산되고 있다. 그리고 세계 경제를 이끄는 리더들은 피지컬 AI를 통해 앞으로 더욱 상상하지 못한 미래가 펼쳐질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인터스텔라처럼 고도로 발달한 AI가 현실이 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네모난 금속 로봇이 새로운 행성을 찾아 떠나는 인간들을 ‘돕는’ 도구였다는 점을 기억하고 싶다. 인간을 대체하기 위한 AI가 아니라 인간만이 가진 고유의 능력을 뒷받침하고 인간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길 바란다. 따라가기 벅찬 기술 발전 속에서 노동과 윤리, 인간의 존재 이유에 대한 우려가 날로 커지고 있지만, 영화 속 주인공이 말하지 않았는가. “우리는 답을 찾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박상은 산업1부 기자 pse0212@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