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는 종교적 주제가 빈곤한 한국 소설사에서 종교성을 바탕으로 한 서사적 탐구에 남다른 열정과 역량을 보여준 작가다. 우리는 그를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종교적 상상력의 소설가로 아무런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만큼 신성과 초월을 탐색하고 고통과 구원을 기록하는 작가이다. 특히 이승우 초기 소설의 관심은 신과 인간 사이의 갈등 및 조화에 집중되어 있는데, 그에게서는 기독교 작가들이 가질 법한 신성에 대한 찬양과 감상 과잉의 흔적이 전혀 없다. 그의 대표작 ‘가시나무 그늘’(1991)을 두고 문학평론가 김윤식이 “감정 중심주의라든가 샤머니즘적 생명 사상을 역조명하고 그 경계선을 일층 선명히 그려낸 작품”으로 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성(聖)과 속(俗)이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며 신마저도 얼마든지 새로운 해석이 가능한 존재로 형상화하였다. 그 결과 그의 종교적 상상력은 세상과 절연하지 않은 채 한껏 세상을 포용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이승우 소설은 삶의 여러 속성이 충돌하는 자리에서 태어나고 있지만 그는 그러한 쟁점들을 완결된 해답으로 몰아가는 것에 대해 근본적으로 반대한다. 그것을 두고 신앙적 이성주의로 명명하는 일은 자연스럽다. 그러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신과 인간의 중간 존재가 아니라 참다운 통합체였듯이 이승우에게 삶과 죽음, 성과 속, 초월과 참여 등은 모두 하나로 통합되어 왔다. 물론 그의 이러한 미학은 주류적 원리주의자들로부터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그가 신성에 대한 맹목적 찬양이나 투항을 완강하게 거절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는 복음주의와 참여주의의 조류를 균형적으로 관찰하고 양자 모두를 회의했다. 어느 한 편에 귀속되려면 어떤 적대적 대결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그는 처음부터 그러한 대결을 피하고 회의와 관찰만을 성실하게 거듭했다. 어느 곳에 투항하지 않으면서 어느 곳도 포기하지도 않는 경계인으로서 그는 이렇게 홀로 우뚝하다. 교황 저격 사건을 모티브로 쓴 등단작 ‘에리직톤의 초상’(1981)에서 그는 신을 향한 외경과 그럼에도 찾아오는 갈등과 회의를 소설적으로 표현했다. 이때 그는 자유인의 속성을 분명하게 보여주었다. 그의 자유는 신과 인간을 상호적 긴장으로 받아들이고, 여전히 갈등하면서도 깨어 신을 향하는 태도를 균형적으로 품고 있었다.
이승우는 이러한 균형감각을 통해 초기 소설을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해 갔다. 하나가 소설집 ‘미궁에 대한 추측’(1994)에 반영된 세속적 권력에 대한 비판과 풍자라면, 다른 하나는 장편 ‘내 안에 또 누가 있나’(1995) 등에 담긴 독이 퍼진 세상을 향한 경계와 비판이다. 그에게 소설이 할 수 있는 최대의 실천력은 사회에 퍼진 폭력성과 세속성을 해체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비판의식은 ‘목련공원’(1998)에 오면 인간 내면탐구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신성과 초월의 주제를 사랑 쪽으로 가져가게 해준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승우는 1980년대 이후 널리 읽힌 디트리히 본회퍼나 하비 콕스, 폴 틸리히 같은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입었다. 더불어 사르트르나 카뮈, 카프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에게서 자신의 문학적 수원을 공급받았다. 그는 “잃어버린 신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신성한 것입니다”(‘목련공원’ 작가의 말)라고 역설했는데, 이후 소설적 전개는 이러한 신성과 인간을 동시에 지향하는 사랑의 루트 쪽으로 바쳐졌다. 그렇게 이승우 소설은 신성과 초월을 탐색하는 고통과 구원의 기록으로 끝없이 이어져 왔다.
최근 출간된 김주연의 ‘이승우의 사랑’(2023)은 이승우의 작품 세계를 ‘사랑’이라는 키워드로 탐구한 역저이다. 종교를 품고, 종교를 넘어 사랑으로, 어쩌면 이 궤적은 이미 세계적 작가인 이승우가 가야 했던 필연적 경로였을지도 모른다. 사랑이야말로 기독교 작가가 추구할 궁극의 지향이 아니었겠는가. 이러한 개성적 면모가 한국 소설사에서 뿌리는 빛은 단연 눈부시고 돌올하다. 다음에 그의 후기작을 살핌으로써 우리는 왜 사랑이 이승우라는 종교적 상상력의 작가가 도달한 최량, 최종의 귀착점이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