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8세기 프랑스 개신교도를 지칭하는 위그노는 박해와 저항의 역사로 알려져 있다. 위그노 가운데 마리 뒤랑이라는 여인은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녀는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위해 살다가 체포돼 수십년간 옥살이를 했다. 그녀가 위그노의 영웅으로 추앙받게 된 것은 감옥 안에 ‘레지스테’(resister·저항하라)라는 글자를 새겼기 때문이다.
마리 뒤랑은 1711년 프랑스 남동부의 아르데슈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재판소 서기였고 오빠 피에르 뒤랑은 개신교 목사였다. 당시는 루이 14세가 종교적 관용을 표현한 법령인 낭트칙령을 폐지한 시대였다. 개신교 예배나 모임이 철저히 금지됐고 목사들은 즉시 프랑스를 떠나야 했다. 그러나 뒤랑 가족은 남아 있던 개신교인들과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피에르 뒤랑은 이른바 ‘사막 집회’로 불리는 비밀 야외예배를 통해 개혁 신앙을 지켰다. 당국은 이들의 신앙 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가족들을 체포했다.
마리의 오빠 피에르는 감옥에 갇혔다가 3년 뒤 몽펠리에 광장에서 공개 처형됐다. 사형 집행 당시 장대비가 내렸는데 집행자들은 교수대 앞에 선 그에게 마지막으로 기도할 기회를 줬다고 한다. 피에르는 이때 시편을 큰 소리로 노래했다. 시편은 핍박받던 위그노들이 암송하며 함께 부르는 노래였다.
마리 역시 1730년 남부 에그모르트 지역 성채 모양 감옥인 콩스탕스 탑에 갇혔다. 불과 열아홉 나이였다. 마리는 감옥에서 개신교 예배를 드렸거나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한 여성 30여명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마리는 다른 여성들보다 젊었고 교육을 받았기에 지도자로 활동했다. 동료들을 챙기며 그들의 옷을 수선해주거나 대신 편지를 읽고 쓰는 일을 도왔다. 병든 수감자들을 헌신적으로 돌보기도 했다.
무엇보다 마리는 다른 여성들의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읽어주는 한편 목회자였던 오빠가 성도들에게 설교했던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들려주기도 했다. 위그노는 장 칼뱅의 신학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로 철저한 개신교 신앙을 견지했다.
마리는 이 콩스탕스 탑에서 무려 38년을 살았다. 수감자 중엔 마리보다 더 오래 수감된 여성도 있었다. 마리 로베르라는 여인은 41년을 갇혀 있었다. 답답한 감옥에서 여성으로서 그토록 오래 생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강한 신앙을 소유했다고 하더라도 시험에 들거나 타협할 수밖에 없다. 실제 콩스탕스 탑의 소장과 가톨릭 당국은 이들을 회유하기 위해 수없이 개종을 제안했고 개종에 서약하면 감옥에서 나갈 수 있었다.
마리가 레지스테라는 말을 새긴 것은 이 같은 시험과 유혹을 이겨내기 위한 방식이었다. 마리는 감옥 중심에 있는 물을 길어 올리는 구멍 주위에 그 단어를 새겼다. 비진리에 저항하고 양심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저항하라는 메시지였다. 마리는 어쩌면 고통스러운 현실과 유혹 앞에서 흔들리는 자신을 위해, 그리고 동료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해 새겼을 것이다. 그렇게 고통의 시간은 끝났고 마리는 57세의 나이에 자유의 몸이 됐다. 마리는 출감 이후 고향으로 돌아가 8년을 더 살다가 사망했다. 순교를 당하진 않았지만 삶 자체가 순교자적이었다.
위그노 후예들은 오늘날에도 매년 9월이면 프랑스 남부 앙뒤즈에 모여 사막 집회라는 옛 이름으로 야외예배를 드린다. 참석자들은 예배에서 과거 위그노들의 예배 형식과 시편 찬양을 재현하며 조상들의 고난과 신앙을 기억한다.
한국교회 역시 매년 종교개혁일이 되면 오직 성경, 오직 그리스도,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5대 솔라(Sola)’를 되새기며 종교개혁 정신을 기린다. 그럼에도 교회의 현실을 보면 개혁이란 말 자체가 낯설어진 데다 그 의지조차 상실한 모양새다. 물질문명의 혜택과 세속주의의 풍조 속에 동화된 채 습관적 신앙만으로 살아가는 신자들의 모습도 포착된다. 마리 뒤랑의 레지스테 신앙이 필요한 이유다.
신상목 종교국 부국장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