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좋아하는 단어는

입력 2025-10-31 00:32

얼마 전 후배가 물었다. “선배는 어떤 외국어 단어를 좋아하세요?” 한참을 생각하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일본어 ‘시시오도시(ししおどし, 鹿威し)’를 좋아한다고. 일본 정원 한켠, 대나무 통이 천천히 물로 차오르면 어느 순간 무게를 이기지 못해 “딱!” 소리를 내며 고요를 깬다. 그리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린다. 단순한 장치지만 그 리듬이 참 좋다. 채워지고 비워지는 시간. 고요와 소리가 교차하는 찰나의 순간이 마치 마음의 움직임 같다. 시를 쓴다는 건 어쩌면 그 ‘딱’ 하는 한순간을 기다리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어의 대나무 속에 감정이 차오르다, 더는 머금지 못해 터져 나오는 소리. 그게 시의 순간이다.

영어 단어 중에서는 ‘regret’을 좋아한다. 흔히 후회라고 번역된다. 하지만 어원에 대한 여러 해석을 살펴보면 ‘re’는 되돌림을, 고대영어 ‘grætan’은 울다를 뜻한다. 그러니까 ‘되돌아가 울다’. 참 정확한 말 같다. 후회는 단순히 잘못을 되짚는 감정이 아니라, 이미 흘러가 버린 시간을 다시 불러 세우는 기억의 형식이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를 지나며 우리는 다시 울기도 한다. 후회는 슬픔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기억이 품은 품격이다.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이 시간과 화해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한자 중 ‘焚(불사를 분)’ 자도 멋지다. 나무 두 그루 사이에 불이 이는 형상이라는데, 그 조형이 참 근사하다. 불은 모든 것을 태우지만 동시에 새 질서를 세운다. 정화와 폭력, 소멸과 재생이 함께 깃든 글자다.

사람마다 마음속에 하나의 불이 있다. 어떤 이는 그 불을 두려워하고, 어떤 이는 그 불로 길을 밝힌다. 나에게 ‘분(焚)’은 삶을 뜨겁게 사랑하라는 징표이자, 다시 태어나는 법을 알려주는 글자다. 삶도 마찬가지다. 채워지고 비워지고, 울고 웃으며, 그렇게 우리는 조금씩 타오른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