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잔말 말고 파워냉방’

입력 2025-10-31 00:35

뜻 모르는 밈 듣고 어리둥절
같은 시공간에 다르게 살아
인정하고 공감하는 게 중요

“잔말 말고 에어컨 파워냉방으로 틀어!”

누군가 불쑥 이 말을 내뱉자 갑자기 웃음이 번진다.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했지만 학생들은 배꼽을 잡는다. 요즘 유행하는 밈이라나. 얼결에 표정 관리를 해보지만 영문을 모르겠다. 호기심이 발동한다. 설명을 청하니 머뭇거리고 난감해한다. 듣자마자 웃음이 터지지만 설명하기는 어려운 그것, 밈의 세계다.

AI에게 물어보니 역시 자신 있게 답을 내놓는다. 어떤 코미디 프로그램 대사에서 시작된 말로, ‘지금 바로 행동하라’는 다급한 어조에 더위와 짜증이 뒤섞인 시대 감각이 맞물리며 유행했다고 한다. 지난여름 힘들었던 폭염, 심하게 과장된 말투, 그리고 짧고 강렬한 영상 모두가 그 안에 있었다. SNS는 그걸 빠르고 재밌게 소비했고 밈이 돼 순식간에 퍼졌다.

몇 해 전 ‘메타버스’가 유행한 때가 있었다. 각자의 아바타가 참여하는 디지털 가상세계. 현실의 제약을 넘어 새로운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비물질적이지만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는 세계. 그것은 코로나19 팬데믹과 맞물리며 일종의 유토피아처럼 주목받았다. 그곳에서는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 정체성이 동시에 존재하며 현실과 가상이 자연스럽게 겹쳐진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현실이 이미 메타버스다. 같은 시대를 살아도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하고, 같은 사건을 보아도 전혀 다른 시간 속에서 반응한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파워냉방’을 외치는 쇼츠 영상이 1000만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해도 어떤 이는 그 존재조차 모른다. 이토록 동떨어진 감각들이 ‘동시대’라는 이름 아래 함께 살아간다.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이런 현상을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불렀다. 1930년대의 독일 사회를 분석하면서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역사적 시간’을 산다는 통찰을 그렇게 표현했다. 근대 산업사회에서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사람들은 전근대적 정서와 신화적 사고, 종교적 열망을 동경했다.

블로흐는 나치즘의 등장을 그 관점에서 분석했다. 급변하는 사회에서 밀려오는 불안을 이성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과거의 권위주의에 매달려 해결하려 했다. 잃어버린 영광과 빼앗겨버린 안정을 되찾아주겠다는 말에 매혹됐다.

오늘날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한쪽에서는 디지털혁명의 물결 속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밈을 즐기고, 다른 쪽에서는 냉전과 증오의 그림자를 되살리고 있다. 어떤 이는 국민교육헌장을 외던 기억 속에, 또 어떤 이는 빛의 속도로 흘러가는 스마트폰의 화면 속에 산다. 합리성과 주술이라는 이질적 시간대가 뒤섞여 있다. 모두가 2025년에 살지만 각자의 시간은 다르게 흐른다.

이 비동시성의 시대에 가장 위험한 것은 ‘우리 모두 같아야 한다’는 믿음이다. 서로 다른 감각과 세계를 가진 사람들이 평화롭게 공존하려면 필요한 건 동질성이 아니라 합의된 규칙과 존중이다. 다름을 무기력하게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조율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유행하는 밈을 모른다고 시대에 뒤처지거나 행복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밈을 즐기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려는 마음, 그것이 공존의 첫걸음일 것이다. 문화와 언어, 감각의 속도가 달라도 괜찮다. 우리가 같은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감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잔말 말고 에어컨 파워냉방으로 틀어!”

무더위에 지친 농담이지만 어쩌면 우리 시대의 주문 같다. 차분히 설득할 여유도 없이 서로 다른 시간대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야 하는 세계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같이 버티는 법’을 배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가 가고 어느새 쌀쌀해졌다. 이제 필요한 것은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잔말 말고 공존 모드로 파워난방!’

허영란 울산대 역사문화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