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정치 양극화 시대를 사는 법

입력 2025-10-31 00:34

요즘 한국 사회의 분열은 더 이상 정치 진영의 문제가 아니다. 진보와 보수의 대립은 이제 이념의 차원이 아니라 감정의 전쟁으로 번지고 있다. 우리는 논리보다 감정으로 싸우고, 설득보다 혐오로 반응한다. 이것은 제도 개혁만으로는 풀 수 없는 마음의 문제, 감정의 위기다.

많은 정치평론가는 양당제 구조나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 때문에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됐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분열을 단지 제도 탓으로만 돌리기엔 설명이 부족하다. 이 현상은 한국만이 아니라 미국과 유럽, 전 세계가 겪고 있는 시대적 병리이기 때문이다. 필자의 시각에선 그 밑바탕에 디지털 문명이 자리 잡고 있다.

디지털 세대의 가장 큰 함정은 ‘필터 버블’과 ‘에코 챔버’다. SNS 알고리즘은 사용자의 취향을 분석해 유사한 정보만 보여준다. 결국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말만 듣는다. 서로 다른 생각은 차단되고,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분노와 확신을 키운다. 이렇게 형성된 디지털 감정의 방이야말로 오늘날 정치 양극화의 진짜 무대다.

최근 수능을 앞두고 서울의 한 여고 앞에서 벌어진 극우단체의 ‘위안부 소녀상 철거 집회’ 예고는 필터 버블로 갇혀버린 에코 챔버 효과를 드러낸다. 무턱대고 이들은 ‘위안부는 매춘부’라며 피해자를 조롱하고, 학생들이 세운 소녀상을 ‘흉물’이라고 부른다. 경찰의 제한 통고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다. 그들이 들려주는 언어는 논리가 전혀 없는 그저 이유 없는 분노와 혐오의 증폭이다. 이런 행위는 그저 과거 사실에 대한 이견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의 공감 능력을 파괴하는 폭력이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정치 지도자들은 이런 감정 메커니즘을 이용해 지지층을 결집시킨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치 전략처럼 한국의 일부 정치인도 전통 언론을 우회해 소셜미디어로 직접 분노를 자극하고 지지층의 감정적 에너지를 증폭시킨다. 이때 SNS는 공론장이 아니라 ‘감정 증폭기’가 된다. 이성과 논리는 점점 사라지고, 증오와 불신의 언어만이 남는다.

위안부 피해자 이야기는 단지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그들의 상처에 대한 존엄은 우리가 인간으로 남을 수 있는 최소한의 기준이다. 그 상처를 부정하고 조롱하는 것은 단지 역사적 사건의 왜곡만이 아니라 최소한의 공감 능력을 상실했다는 경고음이다. 민주주의는 제도로 유지되지만 관계로 일상을 살아간다. 그 관계의 가장 기초 단위가 바로 우리의 감정이다.

감정은 바이러스처럼 퍼지지만 치유 또한 감정에서 비롯된다. 분노 대신 이해로, 혐오 대신 연민으로, 우리는 다시 대화할 수 있다. 내 편이 아닌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가 왜 그렇게 느끼는지 잠시 멈춰 헤아릴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치적 공감’의 시작이다. 결국 이 분열의 시대를 살아내는 법은 상대를 이기려는 기술이 아니라 서로를 다시 이해하려는 인간적 용기다.

최근 미국의 부모들이 자녀에게 다시 ‘유선 전화’를 놓아준다고 한다. 부모보다 아이들의 반응이 더 뜨겁단다. 끊임없는 자극적 정보와 즉각적 반응의 세계에서 벗어나 잠시 멈추어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최적의 훈련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트렌드 속에는 시대의 분열을 극복하려는 노력도 담겨 있다. 디지털의 속도를 잠시 늦추고, 상대의 말과 침묵 사이를 들을 수 있는 감정의 근육을 다시 기르는 일, 그것이 공감의 사회를 만들어 내는 첫걸음일지 모른다. 부정 판단을 잠시 멈추고 서로의 감정을 묻고 귀 기울이는 구성원들이 많아질 때, 우리 민주주의는 다시 ‘더불어’ 살아가는 길을 찾게 될 것이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