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평생 일을 하며 살아간다. 인류의 시작점에서부터 노동은 시작됐다. 인간은 일하는 존재다. 문제는 일에 대한 태도다. 성경의 지혜자는 일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을 보인다. “사람이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수고와 마음에 애쓰는 것이 무슨 소득이 있으랴. 일평생에 근심하며 수고하는 것이 슬픔뿐이라 그의 마음이 밤에도 쉬지 못하나니 이것도 헛되도다.”(전 2:22~23)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하는가. 대체로 셋 중 하나는 있어야 만족할 수 있다. 첫째 보람을 느끼는가. 둘째 충분한 보상이 주어지는가. 셋째 내가 좋아하는 일인가. 셋 중 하나라도 채워지면 그런대로 할 만하다. 문제는 한 가지라도 만만하지 않다. 내가 하는 일에 보람을 느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사람은 찾기 어렵다. 주어진 일이라 어쩔 수 없이 할 때가 많다. 당장 그만두고 싶지만 억지로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내가 수고한 것에 대해 충분히 대우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역시 찾기 어렵다. 고액 연봉자에게 지금 수입이 마음에 드냐고 물으면 몇 퍼센트나 만족한다고 할까. 마지막으로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대학에 들어갈 때부터 마음에 드는 전공을 선택하기보다 미래에 먹고살 일을 고려해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일에 대한 소명보다 돈이 더 중요한 가치가 되었다. 내가 하고 싶은 직업을 선택한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생각이다.
요즘 청년들의 이직률이 높다. 마음에 드는 직장,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내 마음에 들 만큼 보상을 받는 삶은 하늘의 별 따기다.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는 직장에서 피곤한 일상의 반복으로 삶은 빨리 지친다. 그야말로 피로 사회다.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은 오래전에 없어졌다. 미국인들은 정년퇴직까지 평균 45년을 일하면서 14~16개 직업을 경험한다고 한다.
직업은 언제든 바뀔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모세는 왕자로, 목자로,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변신을 거듭했다. 요셉도 목축업에서 노예와 죄수로 애굽의 총리로 역할이 옮겨졌다. 다윗은 목축으로, 사울의 악사 겸 비서로, 망명객으로, 왕으로 전업을 했다. 일 자체보다 일의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다.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허무와 절망이 밀려온다.
현대인들은 일하기 전에 이미 지쳐 있다. 살아있는 동안 일을 피할 수 없다면 일에 대한 관점과 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 일은 수단이지 목적은 아니다. 존재의 목적을 먼저 이해해야 방향이 잡힌다. 일로 만족을 얻을 수 없는 이유는 인간이 일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해 보이는 일이라도 거기서 거기다. 일을 위해 일을 한다면 노예적 삶이다.
일에서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 그것이 소명의식이다. 왜 그 일을 해야 하는가. 일의 가치는 남을 섬기는 데 있다. 소명은 이웃을 섬기라는 부르심에 부응하는 삶이다. 일을 단순히 생계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삶은 피곤해진다.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된다. 돈을 버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섬기는 것이 먼저다.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면 노동의 현장은 잔인해진다. 일터가 즐거울 수 없다. 동료들은 경쟁자로 바뀐다. 그곳에서는 혈투가 벌어지고 전쟁터로 변한다.
성경적 노동관으로 본다면 성직은 따로 없다. 모든 일이 성직이 될 수 있다. 이웃을 잘 섬기다 보니 거기에 자연스럽게 대가가 따라온다. 식당을 운영하는 분이 손님을 가족처럼 여기고 집에서 먹는 것과 같이 따뜻함을 느끼도록 최선을 다하다 보니 단골이 늘어난다. 좋은 제품을 만들고 건강한 먹거리들, 농작물을 생산하는 일을 잘하는 것이 곧 섬김이다.
중세에는 오직 성직자만이 신성한 직분이고 그밖에는 모두 세속적이고 천박한 것으로 취급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소명을 말하면서 청소부 일도 교황의 일만큼 가치가 있고, 칭송을 받을 만하다고 주장한 것은 그 시대에 엄청난 울림을 주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소명이고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예배요, 일터를 예배의 자리로 여기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영적인 것과 일상을 분리하려는 이원론적 방식과의 싸움이다. 신이 나에게 주신 일을 할 때 신바람이 난다고 한다. 그 일을 찾아내는 일이 우선이다. 그 일을 찾아냈다면 세상에 천박한 일은 하나도 없다.
(부산 수영로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