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독일 비텐베르크 성(城)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였다. 종교개혁의 서막을 연 이 사건을 기념하며, 교회들은 말씀의 권위와 신앙의 본질을 되새긴다. 종교개혁의 영향은 단지 신학적 정비에 머물지 않았다. 그 개혁은 음악과 미술을 비롯한 문화 전반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고 감성과 진리가 만나는 접점을 넓혔다. 문화 예술 속에 스며든 개혁 정신은 오늘날에도 신앙의 깊이를 확장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종교개혁 주일의 여운 속에서 문화에 담긴 개혁의 흔적을 되새기며, 이 시대 문화가 신앙과 어떻게 동행할지 묻고 성찰해본다.
이미지 해방, 교육수단이 된 미술
말씀 중심의 신앙 회복을 추구한 종교개혁 역사 속엔 미술의 파괴와 재정립이라는 극단적 과정이 있었다. 장 칼뱅의 교리를 따르던 급진주의자들은 교회 내 형상 사용을 강하게 반대하며 성상 파괴 운동을 주도했다. 루터 역시 초기에는 성상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점차 ‘이미지는 설교의 시각적 보완’이라며 교육 목적의 미술을 인정했고, 이후 교리 전달에 있어 미술 효과를 강조했다. ‘성상 숭배가 문제지 성상 자체는 교리를 가르치는 데 유익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루터의 이러한 태도는 그의 친구이자 화가인 루카스 크라나흐와의 협업을 통해 구체화됐다. 크라나흐는 루터의 초상화를 그려 개혁의 얼굴을 대중에 각인시켰고, 성경 삽화를 통해 복잡한 교리를 쉽게 전달했다. 그의 그림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말씀을 시각화하는 도구였다. ‘비텐베르크 종교개혁 제단화’는 루터의 신학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대표적 사례로 평가받는다.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며 ‘모든 사람이 말씀에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펼쳤고, 인쇄술과 결합한 삽화는 말씀을 대중에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수단이 됐다.
루터는 성경의 이해를 돕기 위해 크라나흐뿐 아니라 알브레히트 뒤러 같은 화가의 판화를 적극 활용했다. 뒤러는 대수난, 요한계시록 등에서 복음의 메시지를 극적으로 묘사했고 루터는 이를 신앙 교육의 도구로 삼았다. 1522년 신약성경 번역본에는 목판화 21개를, 34년 완역 성서에는 100편 넘는 삽화를 수록했다. 루터는 예술을 통해 교리의 본질을 전달하고, 성도들이 말씀을 더 깊이 이해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종교개혁의 정신이 문화와 감성의 영역까지 확장됐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러한 종교개혁 흐름 속에 기존의 화려했던 미술 영역이 위축된 것도 사실이다. 대신 음악의 역할이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는 루터의 교회음악 개혁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예배의 중심을 새롭게 구성하는 계기가 됐다.
루터의 찬송, 대중성의 혁명
루터는 예배 형식과 예술의 흐름까지 바꾸며 신앙의 실천을 대중 속으로 끌어왔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한 찬송가를 작곡했고 라틴어로 진행되던 예배를 독일어로 바꾸었다. 이는 성직자 중심의 예배를 평신도 중심으로 전환한 혁신이었다. 루터는 민요 선율을 찬송에 도입해 누구나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했고 성도들은 노래를 통해 말씀을 체화하며 예배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그가 창안한 ‘코랄’은 단성으로 구성돼 가사의 전달력을 높였고 신앙 고백의 도구로 자리 잡았다. 종교개혁 이전 교회에서는 하나님 찬양도 아무에게나 허락되지 않았다. 찬송은 성직자와 성가대의 전유물로 성도는 따라 부를 수 없었고 감상만 했다. 신앙적 평등주의를 주장한 루터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라는 말씀대로 하나님을 찬양함에 모든 성도가 참여하는 교회음악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음악은 성도가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공동체의 언어가 됐고, 말씀을 품은 예술로 교회 안에서 성장했다.
루터는 음악을 ‘하나님의 선물’이라며 신앙의 언어로 활용했다. 그는 “인간이 아닌 신의 선물이고, 영혼을 기쁘게 만들고, 악마를 물리치고, 순수한 환희를 일깨운다”고 기록하며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드러냈다. 이러한 음악관은 교회음악의 대중화로 이어졌고 예배의 문턱을 낮추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루터는 칸토르 요한 발터, 루드비히 젠플 같은 음악가들과 함께 코랄 모음집을 편찬했고, 이는 이후 수많은 오르간곡과 합창곡의 원천이 됐다.
그의 음악적 유산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에게로 이어져 정점에 이른다. 루터파 교회음악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곡가인 바흐는 수백 편의 칸타타를 남겼다. 종교개혁의 핵심을 함축적으로 나타낸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그의 칸타타 80번의 첫 합창으로 등장한다.
루터의 개혁은 펠릭스 멘델스존을 비롯한 독일 작곡가들에게도 영향을 주며 교회음악의 전통을 확립하는 데 기여했다. 특히 멘델스존은 종교개혁 300주년을 기념해 작곡한 교향곡 5번의 마지막 악장에 루터의 코랄 선율을 담아 그 정신을 음악으로 되살렸다. 루터에게 음악은 단순한 쾌락이 아닌 믿음의 도구였으며 회중이 한목소리로 바치는 신앙 고백이자 신앙의 풍부함을 알려주었다.
문화와 예술 속 신앙을 회복하다
종교개혁은 신앙이 교회 담장을 넘어 일상과 예술 속에서 이뤄지도록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유와 거룩함을 회복한 사건이다. 이는 신앙과 창조성이 조화를 이루는 가능성을 열었다. 중앙루터교회 최주훈 목사는 31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문화는 인간 문명의 흔적이지만 아름답고 의미 있는 하나님의 창조 선물로 볼 수 있다”며 “문화를 ‘전도 도구’로만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창조주의 아름다움을 드러낼 수 있는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총신대 라영환 교수는 “종교개혁이 현대사회에 가져온 가장 커다란 공헌 중 하나는 신앙과 삶의 장벽을 허물었다는 점”이라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대행자로 세우신 인간이 하는 전 영역 가운데 예술만큼 창조성이 강조되는 분야도 드물다”고 역설했다. 미국 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서나영 초빙교수도 “종교개혁은 예술의 영성을 교회 안에 가두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표현하는 영적 언어로 꺼내고 회복시킨 계기”라며 “말씀 중심 신학을 회복했을 뿐 아니라 예술을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는 공적 언어’이자 ‘일상의 영성’을 전하는 소명의 통로로 재정의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통찰은 오늘날 교회가 문화와 예술을 대하는 태도에도 시사점을 던진다. 교회는 문화의 자율성과 소명을 존중하며 복음의 지혜로 함께 걸어가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라 교수는 “기독교 신앙에 의해 풍성해진 예술만큼이나 예술을 통해 풍성해진 신앙이 필요하다”며 “거룩한 예술과 세속적 예술을 구분하는 것은 종교개혁의 전통이 아니며, 예술이 기독교를 장려하는 한에서만 허용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접근”이라고 지적했다.
최 목사는 “모든 예술에 십자가를 그려 넣어야 한다고 강요할 필요가 없다”며 예술이 본연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추구할 때 오히려 창조주의 영광을 잘 드러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서 교수는 “문화에 대한 질문이 많은 청년이 교회 안에서는 그 마음을 자유롭게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교회사역에만 집중하는 인재 양성에 그치지 않고, 세상 속에서 선교사로 살아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방향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 목사는 “루터가 찬송을 작곡하고 성경을 번역하며 복음을 삶 속으로 끌어왔듯, 문화를 통해 창조주를 찬양하고 이웃을 섬기는 기쁨을 누리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맡겨진 종교개혁 정신의 참된 계승이라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신은정 기자 se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