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어떤 괴짜인가

입력 2025-10-30 00:37

“16세기부터 갑자기 서유럽 전역에 읽고 쓰는 능력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미국 하버드대 인간진화생물학과 교수로 인류학과 심리학, 경제학 등을 넘나들며 연구하는 조지프 헨릭의 저서 ‘위어드’(21세기북스)에 나온 표현이다. 저자는 인류사에서 비교적 최근 등장한 문해율 높은 사회의 주요 추동 요인으로 16세기의 ‘프로테스탄트(개신교) 종교개혁’을 꼽는다. 당시 가톨릭 수사였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독일 비텐베르크에서 발표한 ‘95개조 반박문’으로 명실상부 ‘프로테스탄티즘의 시대’를 열었다.

가톨릭교회의 면벌부 판매 등을 비판하며 촉발한 프로테스탄티즘의 핵심 원리는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여기엔 개인이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데 있어 “사제나 교회 같은 제도적 기관의 권위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함의가 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글을 깨쳐 스스로 성경을 읽고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루터가 당대 특권층의 전유물인 라틴어 성경을 민중 언어인 독일어로 번역하고, 각 지역 통치자에게 공립학교 설립의 중요성을 강조한 이유다. 이 영향으로 독일(프로이센)은 세속 정부로서 보통 교육을 도입한 최초의 나라가 된다.

독일을 넘어 서유럽을 휩쓴 프로테스탄티즘의 물결은 민중의 문해율 향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여성의 문해력이 비약적으로 향상했다. 이는 여성의 사회 진출을 높이고 조혼율은 낮추는 동시에 모자 보건 향상에도 기여했다.

이런 양상은 아프리카, 인도 등 세계 각지의 개신교 선교 지역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났다. 그는 “모든 개인이 스스로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종교적 믿음은 유럽을 필두로 한 지구 곳곳에 남녀 모두의 문해력 확대를 가져왔다”며 “이는 정규 학교 교육, 서적 출판, 지식 전파를 자극했다”고 말한다. ‘오직 성경’이 시대정신이 되면서 “혁신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법률을 표준화하며 투표권을 확대해 입헌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토대를 닦았다”는 것이다.

무종교인 저자가 쓴 이 책은 문화적 진화 관점에서 현대 서구 문명에 번영을 가져온 ‘위어드(WEIRD) 심리’를 분석한 것이다. WEIRD는 서구 문명을 특징짓는 5가지 키워드의 머리글자를 조합한 것으로 ‘서구의(Western), 교육 수준이 높고(Educated), 산업화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경향을 뜻한다.

위어드 심리가 끼친 여러 변화를 보며 종교개혁 후예를 자처하는 한국교회 모습을 돌아보게 된다. 한국교회 역시 우리 사회에서 문해력과 교육, 근면과 민주적 공동체를 추구해 왔는가. 구한말 서구 선교사보다 먼저 들어온 한글 성경과 이를 배포하고 가르쳤던 매서인(賣書人)과 전도부인, 교회와 선교사가 세운 여러 기독교계 학교 등은 이를 긍정하는 대표적 사례다. 노동의 가치와 검약 정신, 축첩 금지와 여성 교육을 강조하며 민주·평등 사회 정착에도 기여했다.

지금의 모습은 어떨까. 여전히 불공정한 구조와 권위를 타파하며 지식과 신앙 전파에 힘쓰고 있는가. 아무도 목소리 내지 않을 때 여성 인권을 부르짖은 선조처럼 사회적 약자 지원에 누구보다 앞장서고 있는가. 종교개혁자 장 칼뱅 말처럼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돼야 한다”며 교회의 혁신과 자정 능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가. 어느 하나 자신 있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일(31일)은 ‘종교개혁일’이다. 절대 권력이던 교황에 대항해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성경’을 외친 ‘희대의 괴짜’ 루터의 생각은 서구를 넘어 세계 문명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새 시대를 연 괴짜가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유리돼 역사에 사라질 괴짜로 전락할 것인가. 어떤 모습으로 기록될지는 전적으로 한국교회의 성찰과 성숙에 달렸다.

양민경 미션탐사부 차장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