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휴전 작업’이 만드는 안전 사회

입력 2025-10-30 00:33

대한민국은 가구당 연간 정전시간이 평균 9분에 불과한,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품질을 자랑한다. 이 놀라운 수치는 국가 경제의 동력이자 국민 편의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우리가 누리는 이 ‘끊기지 않는 편의’의 이면에는 2만2900V의 고압 전류가 흐르는 전선 위에서 힘겹게 작업을 이어가는 기술자들의 헌신이 있다. 이는 우리 사회가 ‘효율’과 ‘편의’라는 가치 아래 무엇을 간과해 왔는지 되묻게 한다.

선진국의 사례는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유럽과 미국 등 대부분 선진국에서는 전력 설비 작업 시 전원을 차단하고 잠금장치를 하는 제도를 표준으로 규정하고 있다. 즉, 전기가 흐르지 않는 상태에서 작업하는 ‘휴전(休電) 작업’이 원칙이며, 전기가 흐르는 상태의 ‘활선(活線) 작업’은 극히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허용된다. 이들에게 계획된 정전은 서비스 실패가 아니라 인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가장 합리적이고 기본적인 시스템이다.

우리나라도 작업자와 전력설비 사이의 거리를 확보하는 ‘간접 활선 공법’을 도입한 이후 감전사고가 절반 이하 수준으로 줄어든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0’이 되지 않는 사고율은 더 높은 수준의 안전관리가 필요함을 방증한다. 이는 작업자의 순간 실수가 생명을 앗아갈 수 있는 현장 여건에 대한 개선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진정한 안전은 완벽한 인간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소한 실수가 재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위험 요소를 원천적으로 제거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제 우리 사회도 전력 인프라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야 한다. ‘무중단 공급’이라는 단일 목표를 넘어 ‘안전한 유지보수’를 전력 관리의 핵심 가치로 삼아야 한다. 물론 이러한 전환에는 사회적 합의와 점진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단기적으로는 1시간 내외의 짧은 정전으로 가능한 작업부터 시행해 시민 불편을 최소화하고, 장기적으로는 모든 정규 보수 작업을 휴전 상태에서 진행하는 체계적인 로드맵을 마련해야 한다.

일부에서는 상점의 결제 시스템이나 가정의 의료기기 등 필수전력 공급 중단에 대한 우려를 제기할 수 있다. 하지만 지능형 검침 인프라(AMI)와 인공지능(AI) 기술을 활용해 전기 사용패턴, 부하 예측, 대체 전원 운용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다면, 작업자의 안전을 확보하면서도 불필요한 휴전 구간을 최소화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휴전 작업의 효율성을 높이고, 새로운 전력 관리 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다.

‘계획된 멈춤’은 더 이상 서비스의 중단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더 안전하고 지속 가능하게 만드는 성숙한 약속이다. 우리가 잠시 감수하는 불편함은 누군가의 생명을 지키는 가장 확실한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이제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품질에 걸맞은, 세계 최고 수준의 안전 문화를 만들어 갈 때다.

강현구 한남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