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작곡가’ 김희갑의 음악 인생, 스크린으로 만난다

입력 2025-10-29 01:02
작곡가 김희갑(오른쪽)과 작사가 양인자 부부가 28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 기자간담회 후 ‘손가락 하트’ 포즈를 취하며 미소 짓고 있다. 두 사람이 만든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에 대해 양인자는 “누구나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제대로 가고 있는 건가’ 하는 질문을 품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듣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과 ‘그 겨울의 찻집’, 양희은의 ‘하얀 목련’, 이선희의 ‘알고 싶어요’, 임주리의 ‘립스틱 짙게 바르고’, 최진희의 ‘그대는 나의 인생’ ‘사랑의 미로’, 김국환의 ‘타타타’….

시대를 초월해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이 명곡들은 놀랍게도 한 사람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민 작곡가’라는 수식어가 과하지 않은 인물, 김희갑(89)이다. 록, 트로트, 포크 발라드 등 장르를 넘나들며 3000여곡을 남겼다. 1995년 초연된 창작 뮤지컬 ‘명성왕후’의 음악도 그의 작품이다.

대중가요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거장 김희갑의 삶과 음악을 돌아보는 다큐멘터리 영화 ‘바람이 전하는 말’이 다음 달 5일 관객을 만난다. 김희갑이 작곡한 조용필 노래와 동명이다. 작사가 지명길은 영화에서 “대중가요를 상식으로 자리 잡게 한 유일한 가수가 조용필인데, 그를 만들어준 사람이 김희갑과 (그의 아내이자 작사가인) 양인자”라고 말한다.

영화는 김희갑 본인과 주변 인물의 증언을 통해 그의 생애 전반과 예술 세계를 조명한다. 조용필과 양희은, 김국환, 최진희, 임주리, 혜은이 등 가수들이 직접 인터뷰에 나서 ‘김희갑 음악’과 함께한 영광의 나날을 돌이킨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전환점은 작사가 양인자(80)와의 만남이었다. 1979년 ‘작은 연인들’부터 400여곡을 함께 만든 두 사람은 1987년 결혼해 평생의 동반자가 됐다.

두 사람이 협업한 ‘그 겨울의 찻집’과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단연 불후의 명곡으로 꼽힌다. 조용필은 “김희갑 선생님은 워낙 존경하는 분이라 믿음이 있었다”면서 “(특히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선) 양인자씨의 글이 획기적이었고, 놀라웠다”고 말했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김희갑 음악의 노랫말은 경외의 언어”라며 “저류하는 감성을 포착해 내는 천재성이 있다”고 치켜세웠다.

김희갑 양인자 부부는 28일 서울 용산구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시사회와 이어진 기자간담회에 직접 참석했다. 캡모자와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김희갑은 여전히 청년 같은 모습이었지만, 수년 전 뇌경색 이후 발화에 어려움이 있다. 그는 “정신없이 봤다. (지난날을) 기억하긴 어려웠지만 (영화를 보며) 가슴이 벅찼다”고 짧은 소회를 밝혔다.

대부분의 질문에는 아내 양인자가 대신 답했다. 양인자는 “내가 참 위대한 분과 살았구나 생각했다”며 “그 엄청난 사람이, 세월이 지나며 조금씩 가라앉아 (지금은) 내 옆에 다소곳이 와있는 것이 감사했다”고 말했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거창한 기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웃으로 지내던 양희 감독이 ‘이 위대한 작곡가를 누군가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에 2014년부터 영상을 찍었고, 10년 만에 세상에 내놓게 됐다. 20여년 전 북한산에서 발성 연습을 하다 만난 인연으로 김희갑의 ‘눈동자’를 재해석해 부른 가수 장사익도 간담회에 참석했다. 장사익은 “한강이 냇가를 지나 바다로 흘러가듯이, 선생님의 음악 세계는 마치 태평양 같다. 한국 음악의 큰 바탕”이라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양인자는 후배 음악인들을 위해 저작권을 열겠다는 깜짝 발표를 했다. 그는 “우리 노래가 젊은 창작인들의 손끝에서 새로운 곡으로 태어나길 바란다”며 “앞으로 승인 절차 없이 가져다 쓰시라. 더 바랄 거 없는 영광”이라고 말했다. 김희갑은 “영화 많이 봐주세요”라는 천진한 미소로 짧은 인사를 전했다.

권남영 기자 kwonn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