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광(1945∼1990)은 30세이던 1975년 충남 태안군 안면도 꽃지해수욕장 ‘할배바위’에 수평선과 일치하도록 광목을 한 바퀴 두르는 대지미술을 했다. 자연이라는 한지에 흰 광목으로 휘두른 붓질을 연상시키는 이 행위는 자연을 파괴하는 서구 대지미술의 폭력성과는 달리 자연과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예술 정신을 드러낸다.
전통적인 조각 개념을 탈피해 다양한 조각 실험을 하며 이처럼 대지미술로 확장하던 전위적인 조각가 전국광은 예술 세계를 완전히 꽃피우지 못한 채 45세에 사고로 요절했다. 그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국공립미술관 첫 개인전이 서울 관악구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주인 잃은 작업실에 묵혀 있던 실험적 결과물이 사후 35년 만에 세상에 나와 제대로 소개되는 것이다. 돌조각, 나무조각, 금속조각, 드로잉 등 작품 100여 점을 소개한다. 또한 오랜 기간 병행해 온 시와 수필을 비롯해 작가노트 등의 자필 원고와 육성 녹음을 최초 공개한다.
전시는 ‘쌓는 친구, 허무는 친구’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조각 개념의 확장과 변주에 초점을 맞춘다.
무엇보다 돌을 점토 다루듯 하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어떤 작품은 돌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이고 천처럼 주름지고 치즈처럼 늘어진다. 쌓이고 굴곡진 형태는 자연의 지층에서 보이는 퇴적 작용과 습곡 작용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계단식 피라미드 위에 면사포가 내려앉은 거 같은 돌 조각도 있다. 단단하고 차가운 돌의 물성과는 상반되는 ‘물컹하고 따스한 돌 조각’을 통해 전통적인 조각 개념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했던 작가의 실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통상 이런 작업은 다루기 쉬운 흙으로 빚은 뒤 청동으로 캐스팅해 딱딱한 느낌을 입히는 게 일반적이다. 그런데 전국광은 통일신라의 석공처럼 돌을 깨고 정을 쪼아 이런 형태를 끄집어낸다. 어릴 적 부친의 부재로 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중고교시절부터 할아버지 주선으로 기념 조각 제작자 박재소 밑에서 조각을 연마했다. 67년 홍익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할 때 이미 기술적 완성도를 갖추고 들어와 동료들을 놀라게 했다. 전시장에 놓인 작가의 손 캐스팅은 그가 조각가의 손을 타고 났음을 보여준다. 실제 “손이 좋다”는 칭찬을 달고 살았고 돌 깨는 소리는 리듬을 탔고, 몇 번만 만져도 형상이 튀어나왔다고 홍익대 후배 홍이현숙 작가는 기억했다.
70년대 ‘쌓는’ 작업을 하던 그는 80년대 들어 ‘허무는’ 작업으로 나아갔다. 즉 조각이 갖는 덩어리(매스)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고자 했다. 마침내 커다란 덩어리에서 튀어나온듯 작은 큐빅 형태 돌 조각이 바닥에 깔려 있다. 또 가느다란 철사로 만든 유기적 형상, 빛이 투과되는 아크릴 조각이 공중에 매달려 있다. 파이프나 나무를 쌓아 올리는 등 기존 전통적인 조각 재료에서도 벗어났다. 그렇게 조각가가 상대해야 했던 숙명 같은 덩어리를 마침내 탈피한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쌓는 작업과 허무는 작업의 중간 지점에는 기념비를 연상시키는 조각이 세워져 있다. 1981년 제3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비구상부분 대상 수상작 ‘매스의 비(碑)’인데, 두 작업 세계의 변곡점을 상징한다. 이들 조각은 두터운 부피감을 버린 채 평면처럼 납작하다. 작가의 내면에서 들끓었을 변신에의 욕구를 기념비처럼 증거하는 작품인 셈이다.
전시에는 전화번호부 책을 자른 뒤 이름 부분만 색연필로 칠해서 붙여 만든 작품(무제), 노란색 테이프와 청테이프를 오려서 두께와 방향에 변주를 주며 윤슬을 표현한 작품(매스의 내면) 등 개념적인 작업도 나왔다.
작가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꽃지 해변 ‘할배바위’ 퍼포먼스 등 대지미술로까지 실험정신을 끝까지 밀어붙였지만 이런 대지미술은 이번 전시에는 담아내지 못했다. 열정적인 작업 세계를 전부 보여주기에는 전시 공간이 지나치게 협소했다.
옛 벨기에영사관을 개조한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은 1층과 2층 등 2개 층의 전시 공간을 갖고 있지만 조각가 권진규 유족의 작품 기증 이후 1층 전체를 권진규 상설 전시실로 쓴다. 전체 공간의 절반을 기증 작품 상설 전시 공간으로 쓰는 것은 공간 안배가 효율적이지 못한 측면이 있다. 운용의 묘를 발휘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내년 2월 22일까지.
손영옥 미술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