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우 단체의 혐한 시위가 극성을 부리던 2013년 2월에 있었던 일이다. ‘재일의 특권을 용서치 않는 시민회(재특회)’ 오사카 지부가 코리아타운에서 시위를 벌이던 도중 촬영된 영상이 한·일 양국의 인터넷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영상에는 한 일본인 여중생이 시민들을 향해 “저는 한국인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정말 죽여 버리고 싶어요” “그렇게 거만하게 군다면 난징대학살이 아니라 쓰루하시 대학살을 일으킬 거예요”라고 외치는 모습과 그 곁에서 “옳소!”라며 환호하는 재특회 시위대의 목소리가 담겨 있었다. 벌건 대낮 자국민과 외국인으로 붐비는 거리에서 버젓이 대학살을 운운하던 그 장면은 일본 사회의 숨겨진 민낯을 드러내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거리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펼쳐지고 있다. 지난달 29일부터 중국인 단체 관광객에 대해 한시적으로 무비자 입국 정책이 시행된 이후 일부 극우 단체들이 명동이나 대림동 일대에서 혐중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들이 들고나온 팻말에는 “짱깨는 돌아가라” “천멸중공”(天滅中共·하늘이 중국공산당을 멸하리라) 등의 인종차별적 문구가 적혀 있다. 한국인들의 날선 혐오에 놀란 대만인들 사이에서는 ‘전 중국인이 아닙니다’라고 적힌 배지가 유행할 정도였다. 여기에 일부 정치인은 중국인을 전염병 취급하며 혐중 정서를 부추기는 말까지 쏟아냈으니, 우리나라에도 혐오와 증오의 언어가 공공연히 퍼지는 게 아닌지 걱정된다.
혐오는 우리 사회의 그림자를 먹고 자란다. 일본의 혐한 시위가 경기 침체와 정치 불신 속에서 확산했듯 한국의 혐중 정서도 불안과 분열, 분노의 토양에서 생겨나 퍼지고 있다. 한번 생겨난 혐오의 불씨는 걷잡을 수 없다. 인터넷에 오르내리는 루머는 곧잘 사실로 둔갑하고 가짜뉴스는 현실의 구호가 된다. 불안한 사회일수록 혐오는 더 쉽게 정의로 포장되기도 한다.
물론 중국 정부의 인권 침해나 외교적 무례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러나 ‘중국 정부를 비판하는 일’과 ‘일반 중국인을 혐오하는 일’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전자가 이성의 영역이라면 후자는 무차별적이고 무책임한 감정적 폭력이다. 그 선이 무너지면 자유와 민주의 가치는 후퇴할 수밖에 없다. 혐오는 또 바이러스와 같아서 한 번 퍼지면 우리 사회의 가장 약한 곳부터 감염시키고 무너뜨린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너 중국인이지?”라는 놀림을 받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존재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그러니 혐오를 목청껏 외칠수록 우리 사회는 그만큼의 불안을 감추고 있다는 뜻이 된다. 그렇게 혐오는 언제나 더 큰 증오를 낳는다.
우리의 혐중 시위를 보노라니 과거 일본의 혐한 시위가 오버랩된다. 한때 일본 극우의 광기를 손가락질하던 우리가 이제 그들의 그림자를 따라가고 있다. 남을 향한 증오의 언어는 언젠가는 나를 향한 부메랑이 돼 날아온다. 혐오를 방관하는 사회는 결국 자기 자신을 향해 총을 겨누게 된다.
민주주의는 다양한 목소리를 품을 때 강해진다. 다양성이 깨지면 자유는 모래처럼 흩어지고 공동체는 붕괴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분노가 아니라 성찰이 필요하다. 일본 혐한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지 못한다면 혐중 시위는 한류 등으로 일궈낸 ‘한국=문화 강국’이라는 이미지를 갉아먹을 뿐이다. 혐오로는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저 또 다른 혐오를 낳을 뿐이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혐오나 분노가 아니라 인간의 품격이다. 그것이 사라진 사회에선 희망을 품을 수 없다.
김상기 콘텐츠랩 플랫폼 전략팀 선임기자 kitti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