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재덕 (20) 알프스 산악 코스 오르내리며 “살아서만 돌아가자”

입력 2025-10-30 03:06
2011년 이탈리아 토르 데 지앙 대회 체크포인트에서 파이팅을 외치는 심재덕 선수.

이탈리아에는 세상에서 가장 험한 울트라 대회가 있다. 토르 데 지앙(Tor des Geants, TDG), 대회 이름의 뜻은 ‘거대한 바위들의 산’이다. 이름 그대로, 알프스 몽블랑 일대를 무대로 2000m급 봉우리 25개를 넘어야 하고 34개 마을과 30개의 호수를 지나 333㎞를 150시간 안에 완주해야 한다.

대회 정보는 거의 없었다. 홈페이지는 영어조차 지원되지 않았고 소개 영상 몇 편이 전부였다. 매일 밤 모니터 앞에서 영상을 돌려봤다. 선수들의 장비와 복장, 구간별 지형을 노트에 옮기며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경기는 7개 구간으로 나뉘었다. 하루 1구간씩 50㎞를 달리면 제한시간 내 완주가 가능하지만 선두권에 들려면 하루 100㎞ 이상을 달려야 했다. 나는 첫 구간 48.6㎞를 7시간54분16초에 통과했다. 10위. 체크포인트에서는 구간 이름이 새겨진 배지를 받았다. 7개를 모두 모아야 완주다.

1위와 50분 차이. 마라톤으로 치면 불과 5㎞ 정도였다. 하지만 산에서는 아득한 간극이다. 대부분의 선수가 등산용 폴을 짚고 오르막을 버텼다. 나는 거추장스럽다며 맨몸으로 올랐다. 그 오만함을 곧 뼈저리게 후회했다. 오르막에서 폴은 단순한 장비가 아니라 생명줄이었다. 다음 구간부터 폴을 손에 쥐었다. 완만한 코스에서는 선두를 따라잡겠다며 트레일화 대신 마라톤화를 신었다. 부드러운 밑창은 바위와 자갈에 무너졌다. 알프스는 도로가 아니었다. 빠른 속도를 택한 대가로 발가락 뼈마디로 통증이 스며들었다.

밤이 찾아왔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거라는 예보가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했다. 고산지대 날씨는 변덕이 아니라 폭력에 가까웠다. 3000m급 봉우리를 잇달아 넘어야 하는 이 구간에서 선두권 10여명 중 절반이 포기했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꺾였다. 나도 잠시 하늘을 올려다 봤다. 어둠 속에서 흰 구름과 먹구름이 뒤섞였다. 발아래로는 끝이 보이지 않는 협곡이 입을 벌리고 있었다.

79.1㎞ 지점, 자정 무렵이었다. 앞에는 3299m의 콜 로손(Col Loson)이 버티고 있었다. ‘여기서 날이 밝기를 기다릴까, 아니면 계속 오를까.’ 망설였다. 그때 잠시 하늘이 열리며 별이 보였다. 그 별을 보고 희망을 노래하며 주님 손 잡고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정상까지는 10㎞. 혼자였다. 바람은 살을 베고 빗방울은 얼굴을 때렸다. 안개 속에서 길을 잃었다. 랜턴 불빛이 눈발에 흩어지며 방향을 삼켰다. 8월의 산에 진눈깨비가 내렸다. 장갑 위로 하얗게 쌓이는 눈꽃을 보며 중얼거렸다. “살아서만 돌아가자.” 숨이 끊길 듯 가빴다. 천둥소리가 산을 찢었다.

끝없는 바위 언덕을, 더는 오를 곳이 없을 때까지 기어올랐다. 비로소 하늘이 낮아지고, 희망이 보였다. 그러나 안도할 틈도 없었다. 이제 13㎞ 내리막이 기다리고 있었다. 고산증에서 도망치려면 빨리 벗어나야 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