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유율 1위 ‘넥스페리아’ 中자본 손에
美 압박 속… 네덜란드 정부, 강력 제재
中, 반발… 자국 내 공장 수출 금지 조치
부품공급 차질 초읽기… 車업계 ‘비상’
美 압박 속… 네덜란드 정부, 강력 제재
中, 반발… 자국 내 공장 수출 금지 조치
부품공급 차질 초읽기… 車업계 ‘비상’
세계 자동차 업계가 ‘중국발 공급망 리스크’에 휘청이고 있다. 중국이 일부 차량용 반도체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넥스페리아 중국 공장의 수출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넥스페리아의 지난해 매출은 20억6000만 달러(약 2조9500억원)로 시장 점유율은 9.7%다. 차량용 다이오드와 트랜지스터에서는 점유율 1위, 트랜지스터의 일종인 전력 모스펫(MOSFET)에선 2위다.
본사는 네덜란드에 있다. 필립스반도체의 후신인 NXP반도체 산하의 사업부였다가 분사한 뒤 2019년 중국 최대 스마트폰 조립업체 윙테크가 지분 100%를 인수했다. 넥스페리아가 만드는 범용 반도체는 저가격·저사양이지만 차량 제조에 필수다. 다른 회사 제품으로 대체하려면 신뢰도 검증과 관련 부품의 재설계에 시간과 비용이 필요하다. 단기간에 물량을 확보하기도 쉽지 않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지난해 말 윙테크를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지난달 30일부터 제재 대상 기업이 5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자회사도 자동으로 제재를 받게 하는 규정을 신설했다.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기업이 해외 자회사를 통해 규제를 우회하지 못하게 한다는 취지인데 넥스페리아가 직격탄을 맞았다.
이에 네덜란드 정부는 1952년에 제정된 ‘상품 가용성법’을 사상 처음으로 발동해 개입에 나섰다. 이 법은 국가 안보를 위협하면 민간 기업의 이사회 결정을 정부가 무효화할 수 있는 강력한 통제 수단이다. 지난달 30일 네덜란드 정부는 ‘기술 유출’을 이유로 1년간 넥스페리아의 자산·지식재산권 등을 동결하고 장쉐정 최고경영자(CEO)를 정직 처분했다. 장 CEO는 중국인으로 윙테크 창업자다.
네덜란드는 이 조치가 미국의 블랙리스트 등재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빈센트 카레만스 네덜란드 경제부 장관은 “우연의 일치”라며 “정부의 결정은 미국의 압력이 아니라 장 CEO가 지식재산권을 유럽연합(EU) 밖으로 이전하려 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네덜란드 법원이 공개한 문서를 통해 미국이 지난 6월 장 CEO를 교체하지 않으면 넥스페리아가 블랙리스트에 오를 것이라고 네덜란드에 경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중국은 강하게 반발했다. 중국 상무부는 지난 4일 넥스페리아 중국 공장은 물론 중국 내 협력 업체의 수출까지 금지했다. 넥스페리아는 유럽과 미국, 아시아 여러 나라에 생산 시설을 두고 공정별 철저한 분업 체제를 갖춘 다국적 기업인데 후공정의 70% 이상을 중국 공장에서 처리한다.
중국반도체산업협회는 지난 14일 성명을 통해 “국가 안보 개념을 남용하고 중국 기업의 해외 자회사에 차별적 제한 조치를 한 것에 반대한다”며 “특정 기업에 대한 차별은 개방·포용·협동의 글로벌 반도체 생태계를 파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넥스페리아 중국 법인은 18일 네덜란드 정부의 CEO 해임 조치에 대해 “중국 내에선 법적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직원들에게는 “중국 내 경영진이 회사 운영을 총괄하며 본사의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고 밝혔다.
완성차 업체들은 비상이 걸렸다. 이들 업체가 직접 구매하는 비율은 높지 않지만 협력 업체들로부터 납품받는 부품 상당수에 범용 반도체가 들어간다. 통상 자동차 한 대에 500여개의 범용 반도체가 필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협력 업체의 재고는 2~3주분에 불과했다.
블룸버그통신은 23일 “반도체 부족 사태가 일주일 안에 주요 부품 공급 업체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고 10~20일 내 업계 전체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일본자동차공업협회는 “넥스페리아가 일본의 자동차 부품 제조 업체들에 반도체 납품을 보장할 수 없을 수 있다고 통보해 왔다”고 밝혔다. 독일자동차산업협회의 힐데가르트 뮐러 회장은 “가까운 시일 내에 완성차 생산이 중단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범용 반도체는 수익성이 낮다는 이유로 서구 기업들이 하나둘 철수한 분야다. 반도체 기술 자립을 범국가적 목표로 추진하는 중국이 빈자리를 파고들었다. 해외 기업들을 인수하고 국내 생산 시설을 대폭 늘리면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한 결과 대서방 무역전쟁에서 강력한 무기로 변신했다. 서방 국가들이 환경오염과 채산성 등을 이유로 포기했던 희토류와 양상이 비슷하다.
왕원타오 중국 상무부장과 카레만스 장관은 23일 전화 통화에서 넥스페리아 사태 해결 방안을 논의했다. 왕 부장은 “네덜란드 정부가 넥스페리아에 한 조치는 글로벌 산업과 공급망의 안정성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며 “시장의 원칙과 법치주의를 고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넥스페리아 사태는 지정학적 갈등이 글로벌 공급망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여준다”며 “유럽에서 개발하고 중국에서 제조하는 비즈니스 모델은 지속 불가능해졌다”고 짚었다.
미·중 무역전쟁의 불똥이 다른 나라와 기업들로 튀는 현실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블룸버그는 “네덜란드 기업인 ASML도 미국의 압력으로 중국에 장비 수출을 중단해야 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의 관세 위협으로 격화되는 미·중 갈등에 유럽 기업들이 어떻게 휘말리는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짚었다.
송세영 특파원 sysoh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