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김춘수는 시 ‘꽃’에서 사람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느냐에 따라 존재의 빛깔이 달라진다고 노래했다.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사회가 존재를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기도 한다. 정부가 고용노동부의 약칭을 ‘고용부’에서 ‘노동부’로 바꾼 데 이어 5월 1일 ‘근로자의 날’도 ‘노동절’로 개명키로 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이다.
‘근로(勤勞)’는 ‘부지런히 일한다’는 뜻으로, 조선의 문헌에도 ‘근로하라’, ‘근로를 게을리 말라’는 식으로 쓰였다. 그러나 사회적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은 일제강점기다. 조선총독부가 1930년대 ‘근로보국(勤勞報國)’ 기치로 산업 동원을 독려하면서 근로자는 국가나 상급자에게 충성하는 일꾼이 됐다. 반면 ‘노동(勞動)’은 메이지 시대 일본에서 ‘labor’를 번역한 신조어로, ‘생산수단을 가지지 못한 이들이 권리를 주장하는 행위’를 뜻해 계급적 색채가 강했다. 해방 이후에도 ‘근로’는 국가주의적 맥락에서 선호됐고, ‘노동’은 좌익 용어로 몰렸다.
성경 데살로니가후서 3장 10절에는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는 구절이 있다. 노동은 의무이자 공동체 유지의 조건임을 일깨운다. 흥미롭게도 이 구절은 종교를 아편으로 배척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즐겨 인용했다. 레닌은 1917년 저서 ‘국가와 혁명’에서 이 말을 공산주의 원칙으로 천명, 부르주아지(자본가 계급)를 직접 겨누었다.
이재명정부가 다시 ‘노동’이라는 이름을 꺼내 든 것은 ‘근로’라는 말에 스며든 복종의 뉘앙스를 벗기고, 주체적 인간으로서의 노동자를 드러내겠다는 의지일 것이다. 그러나 이름을 바꾸는 일은 이념 논쟁을 부를 위험이 있다. 언어가 현실을 바꾸기도 하지만, 현실을 덮는 장막이 될 수도 있어서다. ‘노동부’ ‘노동절’이 새로운 권력의 구호가 아니라, 일하는 사람의 삶을 비추는 거울이 되기를 바란다. 이름은 부르는 자와 불리는 자의 관계 속에서만 빛난다. 그때야 비로소 “잊혀지지 않는 눈짓”이 되기 때문이다.
이동훈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