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작스레 다가온 추위에 패션업계가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자 겨울 의류 수요가 급증하면서 매출이 회복세를 보이고 있어서다. 그러나 변덕스러운 날씨는 여전히 업계의 최대 변수로 작용한다. 기상청이 이번 겨울(11~12월) 기온이 평년과 비슷하거나 다소 높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연중 가장 중요한 겨울 시즌을 앞두고 업계엔 긴장과 기대감이 동시에 감돌고 있다. 이처럼 예측 불가능한 기후 속에서 유통·패션업계는 계절의 경계를 허문 ‘시즌리스’ 기획과 판매 흐름에 맞춘 반응생산을 강화하며 대응에 나섰다.
예측 불가능은 지갑을 닫게 만든다
26일 패션업계에 따르면 이상기후가 반복되며 사계절에 따른 판매 시즌 구분이 흐려지고 있다. 지난해엔 11월까지 반팔을 입을 정도로 따뜻한 날씨가 이어지면서 패딩 등 겨울 의류 판매가 부진했다. 이후 지난 2월엔 최근 10년 새 가장 낮은 평균 기온을 기록할 정도로 강추위가 찾아왔지만 이 또한 반가운 소식은 아니었다. 길어진 추위가 봄 신상품 판매를 밀어냈기 때문이다. 패션업계 한 관계자는 “계절이 늦게 시작되면 소비자들은 ‘지금 사긴 아깝다’라는 생각에 시즌 상품을 구매하지 않는다”며 “한 계절의 이상기후가 다음 시즌 실적까지 흔들게 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올해 역시 불안정한 날씨가 이어졌다. 유독 짧았던 여름 장마를 지나 지난달까지 더위가 지속됐다. 이달에 들어서는 잦은 비 소식에 갑작스러운 추위가 겹치며 여름 장마 아이템과 겨울 방한 의류 수요가 동시에 집중되는 현상도 나타났다. 패션 플랫폼 ‘에이블리’에 따르면 지난달 1일부터 지난 21일까지 ‘레인부츠’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98%, ‘레인코트’ 거래액은 108% 증가했다. 같은 시기 ‘경량 패딩’ 거래액은 213% 늘었고, ‘후드 경량패딩’과 ‘패딩 슈즈’도 각각 거래액이 8배 이상 급증했다.
기후위기 돌파구는 ‘시즌리스’
이처럼 판매 시즌의 경계가 흐려지자 업계는 날씨변화에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상품 기획을 강화하고 있다. 삼성물산 패션부문은 레이어링(겹쳐입기) 활용도가 높은 아이템을 중심으로 구성을 바꿨다. 삼성물산 관계자는 “날씨 변동성이 커지면서 두꺼운 아우터 하나보다 겹쳐 입을 수 있는 옷들이 인기”라며 “카디건, 셔켓(셔츠+자켓), 경량패딩 같은 제품 품목이 확대되는 추세”라고 말했다.
여성복 브랜드 ‘구호 플러스’의 카디건 매출은 지난달부터 이달 12일까지 전년 대비 40%가량 늘었다. 일부 니트 카디건 제품은 추가 생산에 들어갔다.
LF는 올해 전 브랜드 차원에서 경량 패딩 라인업을 확대했다. 아웃도어 브랜드 ‘티톤브로스’는 경량 패딩 물량을 지난해보다 20배 이상 늘렸다. 스포츠 브랜드 ‘리복’도 올해 처음으로 경량 패딩 라인을 선보였다. 이전에는 9월 바람막이에서 11월 두꺼운 아우터로 바로 넘어가는 기획 주기를 운영했는데, 올해는 기후 변화에 맞춰 중간 아이템을 새롭게 기획한 것이다. 패딩을 포함해 플리스 재킷까지 경량 아우터 물량을 전년 대비 150% 확대했다.
LF 관계자는 “과거 ‘깔깔이’로 불리며 내피 개념에 머물렀던 경량 패딩이 보온성과 디자인을 모두 갖춘 아우터로 진화했다”며 “이처럼 한 번 구매로 다양한 상황을 커버할 수 있는 제품들이 ‘스마트한 소비’ 트렌드와 맞아 떨어지며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
겨울 장사에 서두르는 이유
이 같은 변화에도 겨울은 여전히 패션업계의 핵심 시즌이자 승부처로 꼽힌다. 겨울 제품은 다른 계절상품보다 단가가 높아 봄·여름보다 가을·겨울 시즌 매출 비중이 커서다. 특히 4분기는 겨울 장사가 본격화하며 연간 매출에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이에 유통업계는 일제히 겨울 장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패션 플랫폼 W컨셉은 오는 29일까지 ‘프리쇼’를 열고 ‘겨울 트렌드 미리보기’를 주제로 퍼·코트·패딩 등 신상품을 선보인다. 현대백화점은 무역센터점과 목동점 등 일부 점포에서 무스너클·노비스·캐나다 구스 등 프리미엄 패딩 팝업스토어를 운영하며 수요 선점에 나섰다.
수익성을 높이기 위해 판매 채널이 겨울 의류를 중심으로 자체 브랜드(PB)를 강화하는 전략도 눈에 띈다. 롯데홈쇼핑은 최근 캐시미어 특화 브랜드 ‘네메르’를 론칭해 본격 판매에 돌입했다. 프리미엄 소재를 합리적인 가격에 선보이는 단독 브랜드 ‘LBL’도 양모를 소재로 한 FW 시즌 신상품을 출시해 지난 8~9월 주문건수가 전년 대비 10% 늘었다.
GS샵도 ‘코어 어센틱’, ‘르네크루’, ‘쏘울’ 등 프리미엄 소재 PB를 리뉴얼하며 포트폴리오를 확장했다. 롯데홈쇼핑 관계자는 “홈쇼핑 브랜드가 ‘가성비’라는 고정관념을 넘어 명품에 견줄만한 패션으로 진화하고 있다”며 “캐시미어 같은 프리미엄 소재를 사용한 니트와 재킷, 코트 등 고급 아우터 상품군들을 확대하며 FW 시즌 패션 전략을 이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리스크 대응에 구조적 변화 필수
기획 전략을 넘어 삼성물산·한섬 등 주요 패션회사들은 생산 구조도 탄력적으로 바꾸고 있다. 상품 출시 후 초반 고객 반응을 보고 판매가 좋은 상품은 추가 생산을 진행하고, 시즌 중 시장 트렌드 변화에 따라 새로운 상품을 기획하는 식이다. 한섬 관계자는 “최근엔 발주를 넣고 상품이 출시되기까지의 리드타임을 최대한 줄이고, 판매량 조회 주기를 더욱 촘촘히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수요를 예측해 재고를 유연하게 관리할 수 있는 ‘프리오더’(사전 주문)도 확대되는 추세다. 신세계백화점은 지난 7월 전국 11개 점포에서 대규모 모피 사전 주문 행사를 진행했다. ‘선 주문 후 생산’ 방식으로 재고 리스크를 줄이고 시즌에 앞서 시장 반응을 확인해 생산량과 상품 구성을 조정하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기후변화 리스크에 대응하기 위한 협력 체계도 등장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 12월 주요 패션 협력사 15개사와 바이어로 구성된 20여명 규모의 ‘기후 대응 태스크포스(TF)’를 출범시켜 매달 정기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시즌별 기획 물량과 출고 시점을 포함한 물류 일정 등을 조율해 이상기후로 인한 판매 차질을 최소화하는 것이 목표다. 최근엔 시스템 고도화를 위해 내년도 계획 수립에 착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신주은 기자 ju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