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진료실에 들어온 40대 남성 환자 이야기다. 회사 건강검진에서 우연히 발견한 혈당 이상으로 병원을 찾았는데 이미 당뇨 합병증이 시작되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병원 통보가 있기 전까진 몸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전혀 몰랐습니다.” 병이란 어느 날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매일의 습관과 보이지 않는 데이터 속에서 이미 조용히 자라고 있다. ‘개인 참여형 의학’이 필요한 이유다.
미래 의학을 설명하는 ‘다섯 가지 P’가 있다. 정밀의학, 예측의학, 예방의학, 맞춤 의학, 개인 참여형 의학이다. 이 중 마지막인 참여형 의학은 가장 추상적으로 보이나 기실 다른 네 가지 의학을 현실로 만들어내는 원동력이다. 정밀의학이 유전자를 분석하고 예측의학이 질병 가능성을 알려주며 예방의학이 발병의 길을 차단하고 맞춤 의학이 나에게 맞는 치료를 제시한다면 참여형 의학은 환자가 그 과정에 몸소 들어와 치료 방향을 함께 만들어가는 것이다.
이 변화는 이미 진행 중이다. 손목에 찬 스마트워치가 심전도의 작은 이상을 포착해 심방세동을 조기 발견한 사례는 이미 보고된 바 있다. 부정맥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이 시계 알람을 받고 병원을 찾아 수술 시기를 놓치지 않은 경우다. 한 암 환자는 항암제 치료 중 겪은 부작용을 온라인 환자 모임에 공유했는데, 수백명의 유사한 경험이 모여 신약 연구자가 간과한 패턴을 밝혀내기도 했다. 희귀질환 환자는 스스로 데이터를 모아 연구자에게 제공하며 치료제 개발을 앞당기고 있다. 환자가 단순한 수혜자가 아니라 데이터 기록자이자 새로운 의학 지식의 제공자가 되는 것이다.
개인 참여형 의학이 자리 잡으면 개인은 치료의 주체가 된다. 내 몸의 데이터를 내가 먼저 알고, 그 데이터를 토대로 의사와 대화를 나누며 치료 방향을 결정한다. 그 과정에서 치료 효과는 높아지고 약물 부작용은 줄어든다. 국가 차원에서는 더 큰 효과가 나타난다. 당뇨나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 환자들이 스스로 생활을 조율하면 합병증이 줄어든다. 이는 의료비 절감과 사회적 부담 경감으로 이어진다. 한 사람의 참여가 결국 공동체 전체의 건강을 끌어올리는 셈이다.
물론 환자가 데이터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하고, 개인정보 보호 문제도 풀어야 한다. 그러나 환자의 참여 없이는 네 가지 P는 종이 위의 설계도에 불과하다. 참여가 있어야만 설계도가 실제 건물로 세워진다.
건강을 의사의 손에만 맡겨둘 수 없는 시대다. 내 몸의 작은 변화를 기록하고 이해하며 치료의 주체로 나서는 순간, 의학은 한 단계 더 진보한다.
여기에 하나 더 주목할 게 있다. 참여형 의학은 실제 치료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 연속혈당측정기를 꾸준히 사용한 환자군에서 합병증 발생률이 낮아졌다는 연구는 이를 잘 보여준다. 부정맥을 조기 발견한 환자들이 뇌졸중 위험을 크게 줄였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다.
참여형 의학은 환자와 의사 사이의 관계도 다시 쓰고 있다. 과거엔 의사가 진단과 처방을 일방적으로 내리고 환자는 그저 따르는 위치였다면 이제는 환자의 생활 데이터와 선호가 진료 과정의 일부가 되고 치료 결정은 공동 설계가 된다. 이 과정에서 환자의 만족도와 순응도는 올라가고 의사는 환자의 일상에서 지속 가능한 치료 전략을 세울 수 있다.
가까운 미래에는 개인이 손목에서 기록한 웨어러블 데이터와 집에서 측정한 혈압, 유전자 변이 정보가 합쳐져 일종의 건강 점수가 환산될 수 있다. 이 점수를 기반으로 국가의 건강보험 시스템이 각자에게 맞는 검진 시기를 제안하고 개인은 필요할 때만 병원을 방문하는 구조도 만들어질 수 있다. 희귀질환 환자 모임에서 축적한 데이터가 새로운 신약의 단서를 제공하고 일상에서 기록된 식습관과 수면 데이터가 임상시험 설계에 반영되는 시대가 올 것이다.
개인 참여형 의학이 넘어야 할 벽도 분명히 존재한다. 분명한 건 환자가 참여하는 순간 의학은 네 가지 P를 넘어 다섯 번째 P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미래 의학은 결코 병원 안에서만 이뤄지지 않는다. 환자의 손끝과 생활 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선한목자병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