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APEC과 한국의 가교 외교

입력 2025-10-27 00:34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이번 주 경주에서 열린다. 미국, 중국, 일본을 포함해 21개 회원국 정상이 모이는 회의다. 우리나라에서의 개최는 2005년 부산 이후 20년 만인데, 우리나라는 의장국으로서 인공지능(AI) 전환, 문화산업, 저출산·고령화 등 핵심 의제 선정과 논의를 주도하고 있다. APEC은 경제·기술·환경 협력을 이끄는 지역 협력체로서 세계 인구의 37%, 상품 교역량의 50%, 국내총생산(GDP)의 61%를 차지하는 만큼 여기서 이뤄지는 협력 논의와 합의는 세계질서를 선도하는 의미가 크다.

APEC은 탈냉전 시대의 산물이다. 1989년 개방적 지역주의를 표방하면서 지역경제 협력 촉진과 자유무역 질서 강화를 목표로 출범했다. 그러나 이면에는 정치적 고려도 강하게 작동했다. 냉전이 끝나가던 때 아시아와 태평양을 묶은 새로운 지역 개념을 통해 태평양 국가인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을 유지하려는 계산이었는데, 이를 위해 일본과 호주가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이제 탈냉전 시대는 저물고 세계는 질서 전환기에 처했다. 인도·태평양이라는 새로운 지역 명칭이 빈번히 쓰이면서 아시아·태평양은 사용이 뜸해졌다. 하지만 제도의 관성이 남아 APEC은 매년 정상회의를 개최하는데, 미국과 중국 모두 참여하는 드문 협의체가 됐다. 양대 강국의 관계는 국제질서의 향방을 가르는 최대 변수인데, 양국 정상이 만날 수 있는 계기를 찾기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APEC의 새로운 효용이 생겼다. 202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방미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회담했다. 그 결과로 군사소통 채널 복원 등에 합의하면서 적어도 단기적으로는 미·중 관계 안정화를 이룰 수 있었다.

이번에도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이뤄지는 일련의 양자 정상회의에 큰 관심이 쏠리고 있다. 우리 정부는 가교적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달 타임지는 이재명 대통령과의 인터뷰 기사를 실으며 표지 제목을 ‘다리(The Bridge)’라고 붙이기도 했다. 우리의 가교 역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미·중 정상회의 성사다. 모든 APEC 회의에서 미·중 정상회의가 열린 것은 아니다. 미국 대통령 선거 직후였다는 이유가 있었지만 지난해 페루 회의에는 양국 정상이 불참했다. 이번 경주 회의를 계기로 미·중 회담이 성사된 것은 기본적으로는 양국 모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 이후 격화된 경쟁을 안정화하고 관리할 필요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높아진 대한민국의 국제적 위상과 우리 정부의 외교적 노력도 일정하게 작용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미·중 정상이 우리나라를 찾으면서 이 대통령은 미국과 중국 정상과 각각 회담하게 됐다. 최근 선출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와의 회담도 예정됐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판문점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회담할 가능성도 예상되는데, 이 대통령은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도 페이스메이커 역할을 자처한 바 있다.

경주 APEC 정상회의 및 여러 양자 정상회담의 결과는 지역 정세 및 세계질서의 향방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이번 APEC 회의가 성공해 각자도생이 새로운 흐름이 된 현 국제질서에서 국가 간 협력이 다시 활성화되기를 기원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APEC 이후에도 우리의 가교 외교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려면 무엇보다도 외교적 신뢰 기반을 다지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특히 원칙에 입각한 외교를 일관되게 펼쳐야 한다. 또한 미·중 사이에서 어설픈 균형외교를 시도하기보다는 양국 국민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공공외교 노력을 배가할 것을 기대한다.

마상윤 가톨릭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