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제6공화국 성공의 비결

입력 2025-10-24 00:39

6월 항쟁 이후 극심한 혼란
포용·타협으로 희생 최소화

尹정부 계엄 사태 막은 지금
공존의 정신 벗어나선 안 돼

권력 유한성 인정하는 겸손이
다시 민주주의의 도약 이룰 것

최루탄 격발기를 든 전투경찰. 방패 너머로 그에게 손을 뻗어 헬멧에 꽃을 꽂는 대학생. 1987년 6월 항쟁이라면 나는 이 사진이 떠오른다. 분노와 함성이 가득하던 거리에서 평화와 민주주의의 성공을 예감한 순간이었다.

다음 주 월요일인 27일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해 38년 전 국민투표를 한 날이다. 2002만8672명 투표, 93.1% 찬성. 6월 항쟁의 결과물, 제6공화국의 시작이었다.

6공화국은 한반도 역사상 가장 안정적인 발전과 번영을 이뤄낸 시기라고 자부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시민의 권리, 언론의 자유, 정치적 활동의 보장 같은 민주주의가 실현된 것은 물론이고 경제와 문화에서도 세계적인 수준으로 도약했다.

이 성공의 첫 번째 비결은 역시 절차적 민주주의의 확보일 것이다. 국민의 손으로 직접 대통령을 뽑고, 지방자치제를 도입했다. 노동운동의 합법화, 군의 정치적 중립화, 금융실명제 도입, 평화적 정권교체를 차례로 성취하면서 한국 사회는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독재 정권을 무너뜨린 나라는 많다. 그러나 대한민국 6공화국 같은 발전을 모두 이뤄내지는 못했다. 2010년대 전후 중동과 북아프리카를 휩쓴 ‘아랍의 봄’. 세속주의 군사정권을 무너뜨린 자리에 이슬람 원리주의를 주창하는 권위주의 정권이 들어섰다. 비슷한 시기 남유럽이 경제 위기에 빠진 것 역시 제도적 민주화가 안정적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결과였다.

대한민국의 6공화국은 무엇이 달랐을까. 나는 그 두 번째 비결이 대타협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을 진압하던 전투경찰에게 꽃을 건네던 포용과 평화의 마음 말이다. 완벽한 승리를 얻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는 길보다 제도적 타협 위에서 차근차근 함께 미래를 만들어가는 개혁의 노선을 선택했다.

“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당시에도 많은 이들이 말했다. 6공화국 체제는 불완전한 합의였고, 기득권과 저항세력이 공존하는 타협의 산물이었다. 전두환 타도를 외쳤던 민주화운동 세력은 직선제를 얻어낸 대신 5공의 평화로운(?) 종결을 허락했다. 수많은 이들이 생명을 바친 투쟁의 결과로는 만족스럽지 못했지만 더 큰 희생을 막고자 현실적인 대안을 받아들였다. 27년을 이어온 군사정권은 시민의 힘에 밀려 민주주의의 빗장을 열었다. 그 대가로 국민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자신들의 수명을 연장했다.

타협은 최루탄을 걷어내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 세계사적인 격랑과 연이어 닥친 경제 위기에도 6공화국은 무너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력한 회복탄력성을 보였다. 경제 구조 선진화, 정보통신 혁신,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문화의 부흥은 6공화국이 성취한 민주주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으리라. 이것은 우리가 선택한 결과이고, 6공화국의 유산이다.

지난 윤석열정부는 이런 민주주의와 타협의 유산을 저버렸다. 겨울밤 느닷없이 계엄을 선포했다. “국정 마비의 망국적 비상 상황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국정을 정상화하기 위해 대통령의 법적 권한으로 행사한 비상 조치”(12월 12일 대국민 담화)라고 윤 전 대통령은 주장했지만 불완전한 87년 체제의 허점을 노린 기습이었다. 거대 야당으로부터 단숨에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 6공화국 헌정을 뒤흔든 무도한 조치였다. 시민이 국회 앞으로 달려오고 여당 의원들마저 계엄 해제 결의에 동참한 것은 당연한 대응이었다.

계엄 사태 속에 집권한 현재 정부·여당의 처지가 공교롭다. 헌정 체제가 흔들리는 비상한 상황을 수습하고 민주주의를 더욱 공고하게 만들어야 하는 과제를 맡았다. 강력하고 신속한 처방이 필요하다는 인식에는 공감이 가는 면이 있다. 하지만 6공화국의 근간인 민주주의와 타협, 공존과 인내의 정신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여당은 3권 분립 체제, 형사 소송 절차, 언론 표현의 자유 같은 헌정의 기본적인 제도를 단숨에 뜯어고치겠다는 기세다. 절제와 타협보다 속도감 있게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모습이다. 우려스럽다.

속도도 필요하지만 방향이 더 중요하다. 견제와 균형, 절제와 합의, 그리고 권력의 유한성을 인정하는 겸손이 6공화국을 38년간 지켜왔다. 이 나라는 그 정신 위에 찬란한 업적을 쌓았다.

이재명 대통령은 개헌을 약속했다. 성공적인 개헌을 위해서라도 6공화국의 유산을 더욱 보듬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공화국의 품격을 지키려는 노력, 지금은 이것이 필요하다.

김지방 종교국 부국장 fatty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