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교회 국내 첫 목사 안수… 영국성서공회, 권서로 서상륜 파송

입력 2025-10-27 03:05
한국인 최초 신학박사인 남궁혁 박사가 1925년 10월 1일 평양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존 네비우스 선교사, 최초의 권서로 파송을 받은 서상륜,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왼쪽 사진부터). 국민일보DB

1925년 10월 1일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인 남궁혁이 평양신학교 교수로 부임했다. 남궁 박사는 미국 남장로회의 지원으로 프린스턴신학교와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유니온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교수로 임용돼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 발전에 기여했다. 1928년부터 ‘신학지남(神學指南)’ 편집을 맡았다. 신학지남은 1918년 평양신학교에서 창간한 신학잡지다.

1938년 10월 5일 오순절교회가 최초로 목사 안수식을 개최했다. 1904년과 1907년 부흥운동이 휩쓸고 간 한반도에 본격적으로 오순절운동이 전파된 것은 메리 럼시 선교사부터다. 1928년 내한한 럼시 선교사는 한국 최초의 오순절교회인 서빙고교회를 설립하고 박성산 목사를 추대했다. 교단 배경 없이 활동하던 럼시 선교사는 방언과 신유를 강조한다는 이유로 기존 목회자들로부터 배척을 받았지만 꾸준히 오순절 사역을 확장했다. 서빙고교회는 1년 만에 장년 성도수 70여명, 주일학교는 200명에 달했다. 이후 1933년 수창동교회가 세워졌으며 5년 뒤 조선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 안수식이 열렸다. 당시 허홍 박성산 배부근이 안수를 받았다. 그러나 일제의 박해가 심해졌고 럼시 선교사를 포함한 선교사들이 추방당하면서 수많은 교회가 문을 닫았다. 하지만 해방이 되면서 3명의 목사들은 흩어진 성도들을 모았고 교회를 재건했다.

1895년 10월 5일 북장로회, 8개조의 선교정책 신조를 채택했다. 앞서 1890년 한국에서 활동하던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들은 중국 선교사 존 네비우스를 초청해 그의 선교 방식을 도입했다. 네비우스 선교정책은 다음 해인 1891년 북장로교 선교부 연례회의에서 공식 채택되었고 8개 항의 구체적인 선교 신조로 발표됐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자전원칙’ ‘자립원칙’ ‘자치원칙’ ‘선교를 위한 학교 설립’ ‘복음의 보편성’ ‘협동과 연합’ ‘엄격한 훈련’ 등이다.

1882년 10월 6일 영국성서공회가 서상륜을 한국 최초의 권서(勸書)로 국내에 파송했다. 한글 성경의 반포는 한국인 개종자와 권서 또는 매서인이라 불리는 이들이 담당했다. 이들은 성경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복음의 씨앗을 뿌렸다. 1882년 3월 ‘예수셩교 누가복음젼셔’가 나오기 전까지 권서들은 한문성경을 반포했다. 의주 지역의 경우 1879년 백홍준의 전도로 구도자가 나오면서 성경 수요가 늘었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면서 수입하는 폐지 속에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반입했으나 이것으로 부족해 서상륜이 최초의 한국 권서로 파송됐다.

1874년 10월 9일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존 로스 선교사가 제1차 고려문 여행을 위해 출발했다. 고려문은 당시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 지역으로 교역이 이뤄지던 관문이었다. 로스 선교사는 이곳에서 한국 상인을 만나 전도했으며 한국교회 첫 세례자 중 한 명인 백홍준에게 한국어를 배웠다. 또 그에게 한문 신약성경과 ‘훈아진언’을 전달했다. 로스 선교사는 1881년 10월 한글로 인쇄된 최초의 기독교 문서인 ‘예수셩교문답’(요리문답)과 ‘예수셩교요령’(신약 요약서)을 간행한 이후 1887년 최초의 한글 번역 신약성경인 ‘예수셩교젼셔’를 출간했다.

서울 정동의 초기 이화학당 모습. 국민일보DB

1885년 10월 11일 메리 스크랜턴 대부인이 서울 정동에 여성 선교 기지를 확보했다. 이듬해 5월 스크랜턴 대부인은 자택 사랑방에서 한 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1887년 10월 22일 학교는 명성황후로부터 ‘이화(梨花)학당’이란 교명을 하사받았다. 이화학당의 첫 학생은 정부관리의 소실로 남편은 자기 여자가 영어를 배워 후일 왕비의 통역이 되기를 바랐다. 두 번째 학생은 어린 거지였다. 아이 어머니는 병자였는데 대부인의 아들이자 의료선교사인 윌리엄 스크랜턴이 성문 밖에서 발견해 병원에 데려다가 치료해줬다.

1996년 10월 11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한복협)와 기윤실 등 14개 단체 및 교단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주일성수 당부 성명을 발표했다. 주일에도 계속되는 국가 차원의 각종 행사에 대해 기독교인들이 주일을 성수할 권리를 보장해 달라는 요구였다. 한복협은 ‘국가 및 기관 행사 주일 실시 반대 1000만 서명운동’을 펼치며 주일에 치러지는 각종 국가고시나 시험, 운동경기 등을 없애달라고 요구했다. 이 같은 교계의 요구와 노력으로 주일에 시행되던 시험이 평일로 옮기는 등 일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99년까지 일부 정부 기관과 지자체에서 주일 행사를 지속하면서 주일성수 문제는 꾸준히 제기됐다.

1918년 10월 20일 동아기독교회 전영태 김희서 박노기 최응선 등이 시베리아 선교여행 중 선박사고로 순직했다. 동아기독교회는 일제강점기에 조직되었던 침례 교단으로 기독교한국침례회의 전신이다. 캐나다 선교사 펜윅의 주도하에 1906년 충남 강경에서 31개 교회로 대한기독교회 교단을 설립했다가 1921년 조선총독부가 ‘대한’이라는 용어의 삭제를 강요해 동아기독교회로 변경했다. 1933년엔 일제의 탄압에 따른 변절과 세속적 사조의 침투를 경계하기 위해 ‘양무리’란 뜻의 ‘대(隊)’를 이용, 동아기독대로 변경했다가 ‘대’가 군사조직의 뜻이 강하다고 해 또다시 조선총독부가 명칭 변경을 강요, 1940년 동아기독교로 변경됐다. 동아기독교는 신자의 중생체험을 강조하고 침례를 주요 의식으로 실시하는 등 침례교의 복음전도적 신앙을 강하게 추구했다. 해외 선교사업에도 주력해 1890년 장로교와 감리교가 한반도 선교 지역을 분할하자 동아기독교는 다른 교단이 미치지 않은 지역 선교에 착안, 만주와 간도, 시베리아, 몽골 지역 선교에 주력했다. 선교 과정에서는 많은 순교자도 배출했는데 1920년대는 순교의 시대라 불릴 정도였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