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재덕 (17) 작전명 ‘푯대를 향해’… 노베야마서 펼쳐진 한일전

입력 2025-10-27 03:05
심재덕 선수가 2005년 일본 노베야마에서 열린 고원울트라마라톤 우승 트로피와 상장을 들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일본 울트라마라톤 가운데서도 노베야마 고원 대회는 악명이 높다. 노베야마라는 이름만 들어도 고개를 젓는 이들이 많다. 2004년 코리아 울트라 챔피언십 우승 부상으로 일본행 항공권을 받았고 고원이라는 단어에 이끌려 2005년 대회에 등록했다.

그해는 독도 표기 논란, 일본 역사 교과서 왜곡 문제, 일본군 위안부 문제 등으로 한일 양국 여론이 격렬하게 충돌하던 시기였다. 이전까지는 일본 대회장에서 한국 선수들에게도 인사와 소개가 자연스럽게 이뤄졌지만, 그해 대회 전야제의 공기는 눈에 띄게 차가웠다. 우리 일행은 무대 한쪽에서 조용히 식사를 마쳤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내가 잘하는 스포츠를 통해 애국심을 발휘하고 싶었다.

고원의 바람은 얼음 같았다. 다다미방은 짐을 풀고 나면 앉기조차 비좁았지만 준비만큼은 빈틈이 없었다. 구간별 고도·비포장·오르내림을 한 달 전부터 노트에 빽빽이 적어 외웠다. 알람을 맞추고 눈을 붙였지만, 새벽 5시 출발 전까지 설렘과 불안에 밤잠을 설쳤다.

고도 1355m에서 출발. 기온은 5~13도라 했지만 상쾌했다. 5㎞까지는 평탄한 아스팔트, 곧이어 비포장 구간에선 숲의 냄새가 진했다. 10㎞ 랩타임 43분. 오르막을 좋아하는 내게 벅차지 않았다. 전년도 우승자 니시무라 조지의 평균 49분대 기록을 떠올리며 나는 그를 ‘보이지 않는 페이스메이커’로 삼았다. 20㎞ 부근, 잔설이 남은 바위 능선과 낙엽송 자작나무 가문비가 층층이 이어진 길이 펼쳐졌다. “신의 걸작 속을 누비고 있구나!” 속으로 행복한 독백을 뱉었다.

경주 절반을 넘어서자 그늘이 사라지고 태양이 정수리를 눌렀다. 니시무라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작전상 치고 빠지기를 거듭했다. 2㎞ 정도 앞서 나가면 그는 악착같이 따라붙었고, 다시 나는 그의 뒤로 숨어 힘을 모았다. 급수대에서는 그의 목에만 시원한 수건이 걸렸다. 혼자라는 외로움은 오히려 더 큰 힘을 끌어 올리는 마중물이 됐다. 하나님, 엄마, 아내, 아이들, 그리고 고향 분지골. 힘이 되는 모든 이름을 한 번씩 불러냈다.

장거리의 법칙은 단순하다. 내리막은 춤추듯, 오르막은 어금니를 악물고. 더위에 강한 나는 더 뜨거워져도 버틸 자신이 있었다. 급수대에서 그가 바나나와 오렌지를 집어 들 때마다 나는 속도를 올려 그를 흔들었다. 그가 진정하면 다시 뒤로 내려앉아 평정심을 유지했다. 마지막 5㎞, ‘푯대를 향해’(빌 3:14)가 내 작전명이었다. 95㎞ 지점에서 터트릴까, 아니면 조금 더 버텨야 할까. 마지막 질주의 타이밍을 두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동시에 이대로 그의 뒤를 따라 2위로 들어가도 나쁘지 않다는 유혹도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결승 3㎞ 전, 뒤꿈치에 번지던 거대한 물집이 ‘툭’ 하고 터졌다. 아픔이 줄며 착지가 살아났고 가시 속도를 낼 수 있었다. 니시무라는 갈증에 땀으로 젖은 수건을 짜 마시며 버텼다. 나는 1㎞를 더 쫓아가 그의 그림자에 달라붙었다. “지금이다.” 1㎞ 표지판을 지나 스퍼트를 시작했다. 몸이 쭉 뻗으며 그의 발소리가 뒤로 멀어졌다. 마지막 직선 20m를 총알처럼 통과했다. 8시간4분32초. 박수 소리는 우렁찼지만 나를 반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본에서의 첫 우승, 고원 바람만이 조용히 어깨를 두드렸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