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9월 나는 대한민국 국가대표 자격으로 네덜란드로 향했다. 울트라 마라톤(100㎞) 세계 선수권대회는 호수와 초원이 맞닿은 조용한 도시 빈쇼텐에서 열렸다. 대회 준비는 쉽지 않았다. 연초부터 이어진 경기들로 몸은 지쳐 있었고 현지 음식은 입에 맞지 않았다. 슈퍼마켓에서 사 온 빵은 딱딱했고 치즈는 짰지만 이 허기까지도 연단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출국 전, 나는 정봉수 감독의 식이요법을 따라 3일간 소고기만 먹는 ‘황제 다이어트’를 감행했다. 아홉 끼를 치마살 400g씩 구워 먹었다. 3일째엔 탄수화물을 완전히 소진하기 위해 10㎞를 전력 질주했다. 그 후 다시 밥과 된장국 김 바나나 포도로 탄수화물 저장을 극대화했다. 위는 작아졌지만 마음은 단단해졌다. 모든 훈련이 엄숙한 예배처럼 느껴졌다.
대회 전날, 하늘은 잿빛이었다. 먹구름이 두껍게 깔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제발 비만 오지 않기를.’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주어진 여건에 순응하며 그 속에서 최고의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내 모습 이대로 하나님 앞에 맡겨드렸다.
정오가 됐다. 총성이 울리자 선수들이 밀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각국의 내로라 하는 국가대표 300여명이 동시에 달렸다. 코스는 10㎞ 순환로를 열 바퀴 도는 방식이었다. 첫 바퀴는 37분50초,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네 번째 바퀴까지는 리듬이 일정했지만 70㎞를 넘어서자 근육이 굳기 시작했다. 종아리가 단단히 조여왔고 비는 점점 굵어졌다. 체온이 떨어지자 손끝이 저리기 시작했다. 그때 구급차가 내 옆을 따라붙었다. 창문을 연 의사가 물었다. “괜찮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다리는 이미 말을 듣지 않았다.
마지막 바퀴가 남은 상황, 원하는 기록은 이미 물 건너갔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주님, 단 1㎞만 더 달릴 힘을 주소서.’ 짧은 기도가 심장 깊은 곳에서 터져 나왔다. 비는 얼굴을 때리고 바람은 온몸을 밀어냈다. 그러나 마음엔 강 같은 평화가 넘치고 있었다. 이때부터는 기록이 아니라 믿음의 싸움이었다.
결승선이 눈에 들어왔다. 관중들이 우산을 흔들며 환호했다. 다리가 풀려도 폐가 타 들어가도 그 순간은 달콤했다. 7시간13분4초. 세계 21위.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마음이 무너지면 몸은 말할 나위 없이 주저앉게 된다.
결승선을 밟자마자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았다. 대회 관계자가 나를 부축했고 휠체어가 도착했다. 그때 전산 담당자가 다가와 말했다. “아직 한 바퀴가 남았습니다.” 영어가 잘 통하지 않아 그저 멍하니 서 있었다. 비는 점점 세게 내리고 몸은 젖어 얼음장 같았다. ‘정말 한 바퀴를 더?’ 절망이 밀려올 즈음, 한 진행자가 웃으며 달려와 “10바퀴! 10!”이라고 완주를 확인시켜줬다. 엄지를 치켜세운 그의 손끝이 흐릿한 빗속에서도 또렷이 보였다.
그날 밤, 숙소로 돌아오니 피로와 허기 속에서도 마음은 평안했다. 나는 끝까지 최선을 다했고 하나님은 연약한 나를 튼튼히 붙잡아주셨다. 내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케 하시고 내 잔을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부어주심에 감사했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