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의 숨결로 부활한 ‘서편제’… 소리의 본질을 무대에

입력 2025-10-23 01:55
지난 17일부터 고선웅의 연출로 국립정동극장 무대에서 공연 중인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The Original)’의 한 장면. 국립정동극장 제공

“어설프게 만들어 본질을 훼손하는 대신 원작의 텍스트를 충실하게 표현하고 싶었어요. 원작자인 이청준 선생님이 보셨으면 행복해하셨을 작품을 만드는 게 목표였습니다.”

지난 17일 서울 중구 국립정동극장에서 막을 올린 소리극 ‘서편제: 디 오리지널(The Original)’의 연출자 겸 극작가 고선웅은 프레스콜에서 이같이 말했다. 북장단과 소리꾼의 성음으로 구성된 소리극 작품의 제목에 ‘디 오리지널’을 넣은 건 이 때문이다.

고선웅은 그동안 연극 ‘조씨고아’ ‘퉁소소리’ 등 히트작을 내며 공연계를 대표하는 스타 연출가 겸 극작가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국립창극단에서 작창가 겸 음악감독 한승석과 콤비를 이뤄 ‘변강쇠 점 찍고 옹녀’ ‘귀토-토끼의 팔란’ 등을 선보이며 창극 열풍을 일으키는 데 기여했다. 이 작품 역시 두 사람이 다시 호흡을 맞춘 작품이다.

고선웅은 “영화 ‘서편제’는 내 인생작이다. 곧바로 원작 소설까지 찾아봤다. 소리를 통해 우주가 펼쳐지고 인생의 길이 보이는 느낌이었다”며 극장 측의 연출 제안에 곧바로 응한 이유를 설명했다.

영화 ‘서편제’의 원작으로 유명한 이청준(1939~2008)의 연작 단편소설 ‘남도사람’은 1부 ‘서편제’를 시작으로 구성된 5부작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1993년)는 1 2부, 속편인 ‘천년학’(2007년)은 3부를 다뤘다. 이후 2010년 이지나가 연출한 뮤지컬 ‘서편제’와 2013년 국립창극단에서 윤호진 연출과 안숙선 작창으로 올린 창극 ‘서편제’까지 선보였다.

뮤지컬과 창극이 대중에게 익숙한 영화의 흐름을 따르는 것과 달리 고선웅의 소리극은 원작소설 1~3부의 줄거리를 충실히 따른다. 원작처럼 등장인물에 따로 배역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영화 서편제에서 아비 유봉, 딸 송화, 아들 동호로 나왔던 것과 달리 이번 무대에선 그저 아비, 소녀, 사내로 등장한다. 이름 없이 남도의 소리길을 떠돌았을 수많은 소리꾼과 그들의 삶을 구현하기 위해서였다.

그간의 작품들이 소리꾼의 한(恨)에 좀 더 집중했다면, 이번 작품은 한을 예술로 승화하는 과정에 무게를 둔다. 이를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회전하는 대형 원형 무대와 그 위에 놓인 세 개의 작은 원형 무대다. 세 개의 무대는 각 인물의 삶을 상징하기도 한다. 원작에서 인물들이 길 위를 한없이 떠도는 장면을 구현하기 위해 회전하는 대형 원형 무대 위를 배우들이 걷게 만든 연출도 눈에 띈다. 고선웅은 “원형 무대로 구현된 길은 만남과 이별이 교차하는 장소이자 상처가 축적되고 다시 해소되는 심리적 공간”이라고 말했다.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이야기의 주요 고비마다 등장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의 눈대목, 단가 그리고 민요 등 22곡의 음악이다. 원작 소설에 언급된 소리를 바탕으로 하되 인물의 감정과 극적 흐름에 따라 재구성했다. 뮤지컬이나 창극이 동서양 악기를 사용해 새롭게 접근한 것과 달리 ‘비움의 미학’을 지닌 전통 판소리의 본질에 더 가까이 다가간다.

소녀 역은 국립창극단 단원 김우정과 서울대 국악과 학생 박지현, 김우정이 캐스팅됐다. 남원시립국악단 악장인 임현빈과 국악밴드 이날치의 멤버 안이호가 아비 역으로 함께한다. 사내 역으로 국립창극단 단원 박성우와 국악 단체 창작하는 타루 멤버 정보권이 나온다. 공연은 11월 9일까지 이어진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