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모로코에서는 지난달 27일부터 청년들이 주요 도시에서 정부 예산 지출 행태를 비판하는 시위를 벌였다. 청년 시위대는 ‘젠지(Z세대) 212’라는 디스코드(게임 메신저 앱) 익명 서버를 중심으로 세를 불렸다. Z세대는 1990년대 중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사이 출생한 젊은층을 뜻하며 ‘212’는 모로코의 국제전화 국가 번호다. 디스코드 서버 회원은 단 며칠 만에 3000명에서 13만명 이상으로 늘었다. Z세대 시위대는 자신들에게 친숙한 소셜미디어를 시위 정보 교환 창구로 활용했다.
모로코 청년들은 정부가 2030 국제축구연맹(FIFA) 월드컵 공동 개최에 예산을 쏟아부으면서 정작 교육·의료 서비스는 등한시하는 것에 분노했다. 시위대는 “축구 경기장은 있는데 병원은 어디 있느냐”는 구호를 외쳤다. 지난 8월 한 공립병원에서 임산부 8명이 제왕절개 후 잇따라 사망한 사건이 시위에 불을 지폈다. 정치인들 자녀가 다니는 사립학교와 공립학교 간 수준 격차도 비판 대상이 됐다.
최근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에서 청년층이 주축이 된 ‘Z세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있다. Z세대 시위는 특정한 정치적 리더 없이 청년들에게 친숙한 소셜미디어 등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부실한 공공 인프라와 경제난, 기득권층 특혜와 불평등에 청년들이 분노했다는 점도 공통분모다. 인터넷 시대에서 성장한 최초의 세대인 Z세대가 광범위하게 보급된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대중 시위 개념을 재정의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도미노처럼 이어진 반정부 시위는 8월 인도네시아에서 시작됐다. 지난해 9월부터 인도네시아 하원의원 580명이 주택수당으로 1인당 월 5000만 루피아(약 430만원)를 받은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자 분노한 대학생과 노동자 수천명이 거리로 나왔다. 결국 인도네시아 정부와 의회는 특혜성 의원 주택수당을 폐지했다.
네팔의 소셜미디어에선 8월 말부터 소수 권력층 자녀들이 최고급 호텔에서 명품을 과시하는 사진이 퍼졌다. “너희의 사치, 우리의 고통”과 같은 반발 심리를 담은 메시지도 함께 등장했다. 네팔 정부는 ‘가짜 뉴스’라며 소셜미디어 26개 플랫폼 접속을 차단했다. 이는 대통령 관저 방화와 장관 집단 구타 등 폭동 수준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불렀다. 시위 진압 등의 과정에서 70여명이 숨졌고 결국 행정 수반인 샤르마 올리 총리가 사임했다.
아프리카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에서도 ‘Z세대 마다가스카르’라는 지도자 없는 단체가 소셜미디어를 통해 온라인에서 결성됐다. 잦은 단전·단수에 항의하는 젊은이들의 시위가 지난달부터 2주 넘게 이어졌다. 이들은 앞선 네팔의 시위 방식 등을 참고해 디스코드와 메시지 앱 시그널을 통해 익명으로 소통했다. 결국 대통령이 국회 탄핵으로 축출됐고 군부가 권력을 장악했다. Z세대 시위대는 향후 군부가 국민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다시 시위를 벌이겠다는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Z세대 단체 대변인인 톨로트라 앤드리아니리나는 로이터통신에 “한 번 했으니 필요하다면 (시위를) 다시 할 수 있다”고 말했다.
2011년 미국 월가 점령 운동, 2010~2012년 사이 ‘아랍의 봄’ 시위도 대부분 젊은 세대 주도로 이뤄졌다. 최근 Z세대 시위는 특정 국가에서 발생한 시위 상황과 계획 등이 소셜미디어를 통해 빠르게 공유되고 다른 나라의 시위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네팔 시위에 참여했던 유잔 라즈반다는 AP통신에 “네팔 시위 이후 일어난 변화가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전 세계로 퍼졌다”며 “우리는 디지털 공간이 우리 모두를 연결하고 전 세계에서 강력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일본 만화 ‘원피스’에 나오는 밀짚모자를 쓴 해골 해적기가 시위 곳곳에서 활용되고 있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이 만화는 단행본으로 출간돼 전 세계적으로 5억부 이상 판매됐다. 해골 모양 깃발은 주인공 루피가 이끄는 해적단의 트레이드마크인데, Z세대 시위대는 저항과 공감의 상징으로 해적기를 사용한다. 네팔에서 시위대가 정부 청사 앞에 이 깃발을 걸기도 했다.
2018년 미 국방부가 만든 것으로 알려진 Z세대의 반란 워게임 시나리오에도 눈길이 쏠린다. 온라인 매체 ‘더 인터셉트’의 정보공개 청구를 계기로 공개된 관련 문서에 따르면 미 국방부는 사회적 불만에 가득찬 Z세대 중심의 소요 사태를 상정한 대응 시나리오를 구성했다. 시나리오는 시위 참가자들이 다크웹에서 지령을 주고받거나 온·오프라인에서 글로벌 캠페인을 전개하는 것으로 묘사했는데 최근 상황과 비슷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디지털에 기반한 지도부 없는 시위가 국가의 근본적 변화를 이끌어내기엔 부족하다는 진단도 있다. 마다가스카르처럼 Z세대 시위 결과로 군부가 권력을 장악한 경우 실질적 변화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카네기 국제평화재단의 선임연구원 스티븐 펠드스타인은 BBC에 “소셜미디어는 본질적으로 장기적인 변화를 위해 설계되지 않았다”며 “변화를 위해선 분산된 온라인 운동에서 벗어나 장기적 비전과 물리적 유대감을 가진 그룹으로 변화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모든 것을 없애는 ‘제로섬 게임’이 아닌 실행 가능한 정치적 전략을 생각해낼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성원 기자 na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