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경영인이 강남 한복판에 복합문화공간 세운 뜻은

입력 2025-10-22 03:01
이승한(오른쪽) 회장과 엄정희 교수. 신석현 포토그래퍼

높은 빌딩들이 숲을 이룬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 선릉역 인근. 첨단 기업과 자본이 집결돼 있어 ‘테헤란밸리’라는 별칭마저 붙은 이 거리는 쉼없이 달리는 자동차와 사원증을 목에 건 직장인들의 바쁜 발걸음이 멈추지 않는다. 이처럼 경쟁적이고 삭막한 도시 풍경 안에서 잠시 멈춰 숨 고르고 마음을 쉬어갈 공간이 있다면 어떨까.

30년간 전문 경영인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온 이승한(79·지구촌교회 장로) 넥스트앤파트너스(N&P) 그룹 회장과 그의 아내 엄정희(75) 서울사이버대 가족상담학과 교수가 이 빌딩 숲 사이 골목에 서점이자 카페, 공연장이자 상담소인 복합문화공간 ‘북쌔즈’를 세운 이유다.

‘책(book)이 말한다(says)’는 의미를 담아 지은 이름처럼 북쌔즈에 들어서면 우선 책이 눈에 들어온다. 1층 오른쪽 벽면에는 신앙과 인문사회학 서적, 2층은 경영학 관련 도서들이 가득 메우고 있다. 곳곳에서 책을 보며 공부하는 사람들의 모습까지 어우러지며 마치 조용한 도서관 같은 느낌도 준다. 2층까지 높게 트인 메인 공간은 새벽엔 인문학 강의, 점심엔 직장인의 휴식 공간, 저녁엔 독서모임과 강연에 쓰인다. 예술의전당 음악설계팀과 조명기술자들이 설계한 공연장에선 금난새 지휘자의 클래식 공연, 폴 포츠의 자선 콘서트, 설민석 강사의 특강 등 수준 높은 문화 프로그램도 이어지고 있다. 1층 한쪽에 마련된 상담우체통엔 ‘고민을 적어 넣으면 무료로 상담받을 수 있다’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이런 공간은 ‘골목 곳곳에 문화공간이 잘 자리잡으면, 그곳이 주민의 배움터이자 쉼터가 돼 지역 문화를 풍요롭게 한다’는 생각이 녹여진 결과물이다.

서울 강남구 복합문화공간 북쌔즈가 클래식 기획공연사 더브릿지컴퍼니와 함께 개최한 ‘선릉의 사계-봄’ 음악회 모습. 북쌔즈 제공

특히 테헤란로는 이 회장의 인생 여정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1970년 삼성그룹에 입사, 삼성물산 유통부문 대표이사와 홈플러스 삼성테스코 대표이사를 지낸 그는 이곳에서 홈플러스를 창립한 초대 CEO다. 2014년 홈플러스 CEO에서 퇴임했고 홈플러스 본사도 이 지역을 떠났지만 이 회장은 이곳에 의미있는 기여를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 회장은 “크리스천 경영인으로서 그동안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의 인생’을 살았다면 이제는 남은 시간을 ‘의미 있는 인생’으로 채우고 싶었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던 끝에 ‘도시 경쟁력은 살기 좋은 골목과 동네에서 나온다’는 신념으로 2018년 ‘북쌔즈’를 열게 됐다”고 밝혔다.

대표적인 성공 경영인인 그가 북쌔즈에서는 손해보는 리더로 살아가는 것도 같은 이유다. 이 회장은 “성경이 가르치는 경영의 본질은 신뢰와 진심이고, 결국 그것이 가장 큰 자산이자 이익으로 돌아온다”면서 “북쌔즈가 단순한 문화·힐링·배움의 공간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장소가 돼 사람들에게 배움이 되고 쉼이 되며, 위로와 회복이 되는 공간이 되길 소망한다”고 말했다.

소개팅으로 만나 첫눈에 반한 아내 엄 교수도 독실한 크리스천이다. 잘나가는 부부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지만 살아온 삶 속엔 여러 시련이 있었다. 엄 교수는 “5년 만에 얻은 아들을 여덟 살에 사고로 잃고, 그 충격으로 위암 진단까지 받았다”면서 “모든 걸 내려놓고 싶던 그때, 인생의 폭풍 속에서도 가정을 지켜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깨달았다”고 말했다.

북쌔즈에서 재능기부로 진행하는 가족상담 안내 문구. 신석현 포토그래퍼

엄 교수가 북쌔즈에서 무료 상담을 하며 마음을 어루만지는 일을 하게 된 건 이 같은 경험이 바탕이 됐다. 그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나누고자 늦은 나이에 다시 학업에 매진해 50대에 상담학 관련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엄 교수는 “직장인이 많은 곳이라 부부상담도 많다. 역경과 회복의 이야기가 다른 가정을 살리고 치유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소명이라 믿는다”면서 “칭찬은 배우자를 변화시키는 가장 따뜻한 언어다. 작은 격려 한마디가 관계의 온도를 바꾼다”고 조언하고 있다”고 밝혔다.

박효진 기자 imher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