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심재덕 (15) 100㎞ 울트라 두 번째 도전 만에 ‘한국 최고 기록’

입력 2025-10-23 03:04
심재덕 선수가 2007년 제8회 서울울트라마라톤 대회에서 역주하는 모습.

한계는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달리기를 통해 배웠다. 처음엔 10㎞도 가능할지 의심했고 마라톤 풀코스는 감히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해가 거듭될수록 몸은 변화했다. 퇴근 후 공단 신작로를 달리고 새벽마다 굴뚝 사이를 스치며 호흡을 다듬었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도 멈추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내 발소리가 신기하게 위로처럼 들리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흘린 땀과 시간이 근육과 폐에 새겨졌다. 더 멀리, 더 오래 달려보고 싶다는 마음이 그 속에서 자랐다.

하지만 ‘울트라’라는 이름 앞에서는 여전히 겁이 났다. 100㎞라니, 상상조차 하기 힘든 거리였다.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길, 한 발 내딛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움츠러들었다. 2003년 9월 27일 새벽 5시 나는 제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출발하는 제2회 제주울트라마라톤대회에 나섰다. 중문을 지나 차귀도 앞바다를 돌고 산방산을 거쳐 다시 월드컵경기장으로 돌아오는 100㎞ 코스였다. 출발 전부터 머릿속에는 단 하나의 목표만 있었다. 7시간30분대 완주. 그 하나가 믿음처럼 나를 붙잡았다.

출발 신호와 함께 어둠 속으로 몸을 던졌다. 길은 조용했고 새벽바람엔 바다 냄새가 남아 있었다. 30㎞까지는 가벼웠다. 그러나 해가 떠오르자 피로가 밀려왔다. 60㎞ 지점에서 다리는 돌처럼 굳어갔고 허벅지 근육이 뜨겁게 타올랐다. 발톱이 하나둘 들리고 발바닥은 불에 덴 듯했다. 바람은 얼굴을 때렸고 파도 소리는 귓가에서 숨소리와 섞였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울트라는 몸의 싸움이 아니라 마음의 싸움이었다. 스스로를 향해 “아멘, 할렐루야. 할 수 있다”고 말하며 두려움을 한 걸음씩 밀어냈다.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다리가 풀려 그대로 쓰러졌다. 기록은 8시간13분32초, 2위였다. 목표엔 미치지 못했지만 생애 첫 100㎞ 완주였다. 그 고통의 끝에서 국가대표 선발이라는 뜻밖의 부상(副賞)을 얻었다. 쓰러지듯 결승선을 밟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울트라를 하지 않겠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자 몸이 나를 깨웠다. 고통은 희미해지고 성취감이 더 커졌다.

이듬해 5월 대한울트라마라톤연맹이 주최한 2004코리아울트라챔피언십은 세계선수권 국가대표 선발전을 겸했다. 새벽 안개 속, 113명의 선수가 한강 변에 섰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스쳤고 긴장감이 온몸을 감쌌다. 100㎞의 여정이 다시 시작됐다. 초반엔 선두권에 들지 못했지만 울트라는 빠르기가 아닌 인내의 경기다. 60㎞를 넘어서며 조금씩 앞선 선수들의 리듬이 무너졌다. 나는 한 명, 또 한 명을 추월했다. 90㎞ 지점, 종아리가 굳어오고 어깨가 내려앉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은 고요했다. 바람 소리 너머로 숨 쉬듯 기도했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게 하소서.”

결승선을 통과한 시각은 7시간10분26초. 내 이름 옆에 ‘한국 최고 기록’이라는 글자가 새겨졌다. 울트라 두 번째 도전 만에 세운 기록이었다. 믿기지 않았다. 그해 나는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게 세계 랭킹 39위에 올랐다. 9월, 네덜란드에서 열리는 세계 선수권 출전 자격까지 얻었다.

달리기는 체력의 훈련이 아니라 믿음의 연습이다. 한계를 넘는 건 근육이 아니라 마음이고 끝까지 가게 하는 건 욕망이 아니라 은혜다.

정리=손동준 기자 sd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