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사회는 존중이라는 가치를 점점 잃어가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여야 갈등이 첨예하고, 세대 간에는 서로를 이해하려는 노력보다 비난이 앞선다. 학교에서는 학생이 교사에게 대들고, 교사는 교권 침해를 호소한다. 이런 현상의 밑바탕에는 서로에 대한 존중의 결여가 있다. 가장 간단한 해결법은 존중하는 문화를 만드는 것이다. 다만 ‘존중한다’가 무엇인지 모르고, 실천이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 장애물이다.
상담에서는 도움을 청한 사람, 즉 내담자를 존중하고자 노력한다. 존중은 예의 바른 태도나 말투, 존댓말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상담자가 내담자의 고유한 가치와 삶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능력을 믿는다는 것이다. 내담자의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그가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내담자가 있다’는 것은 내담자 스스로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기준을 세워 살아갈 수 있음을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데 상담자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충고나 지시, 설득을 하는 순간 상담실에는 상담자만 존재하고 내담자는 사라진다. 내담자의 삶을 판단하고 방향을 정해주는 순간, 그의 존재를 부정하게 된다.
항상 지각하는 학생이 있다고 해보자. 대부분 사람은 “계속 지각하면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등의 말로 염려를 표현하고 고치려 노력한다. 이런 염려는 “성실하게 사는 게 더 낫다”는 상담자의 판단을 내담자에게 암시하거나 강요하려는 시도다. 이는 내담자의 삶을 거부하는 것이며, 그가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 나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다.
내담자를 존중하는 인간중심 상담자는 “너에게는 세상이 너무 빠르게 움직이는구나”라고 반응한다. 내담자 기준에서 세상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담자는 내담자의 행동을 바꾸려 하기보다 그의 기준을 존중하는 것이다. 내담자의 문제를 고쳐야 할 결함이 아니라 하나의 특성으로 인정하는 것은 그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행위다. 존중은 각자 자기의 세계에서 자기답게 살고자 노력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즉 그의 존재 가치를 인정할 때만 가능하다. 누군가를 변화시키려 하거나, 더 나은 길이 있음을 알려주려 하거나, 자기 뜻을 따르라고 설득하는 것은 모두 상대방을 존중하지 않는 태도다.
느림이나 빠름은 상대적 개념이다. 내가 더 느린 사람이면 내담자의 움직임은 빠른 것으로 인식될 것이다. 자신의 판단 기준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그의 속도를 느낄 수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방식과 속도로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려는 경향이 있다. 느림은 ‘늦음’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 중 한 시점일 뿐이다. 삶의 문제는 특정 순간에는 문제로 보이지만 인생 전 과정에서 바라보면 그 순간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될 때가 많다.
그저 존중만 하는 것이 내담자의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과거 아버지에게 인정받지 못해 고통 겪던 내담자를 상담한 적이 있다. 그는 아버지를 미워하면서도 용서하고 싶어 했다. 복잡한 감정을 동시에 품고 있었지만 자신이 필요한 방향으로 살아가고자 했다. 상담자는 그의 감정과 삶을 있는 그대로 존중했다. 그러자 내담자는 외적 조건이나 문제를 탓하기보다 그런 조건 속에서도 살아온 자신을 귀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자기 연민을 느끼기 시작했고, 자신과 삶을 미워하는 대신 좋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문제에 매이지 않고 자기 존재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존중은 사람과 사회의 변화를 이끄는 강력한 힘이다. 존재를 인정받는 순간 사람은 스스로 회복하고 성장할 수 있다. 우리가 서로를 존중하며 성장을 믿는 사람이 된다면 참 멋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