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젊은 예술가에게 보내는 메일

입력 2025-10-22 00:32

자신의 자리 찾는 젊은이들
불안감 속에 삶을 불태워도
마음에는 늘 평화가 있기를

1873년 7월 10일 브뤼셀의 늦은 밤. 스물아홉 살의 폴 베를렌은 사랑하는 아르튀르 랭보에게 총을 쐈다. 그는 랭보와 조금 더 같이 살고 싶었던 것 같다. 파리로 떠나겠다는 연인에게 애원하고, 매달리고, 빌었지만 잘되지 않았다. 탄환은 랭보의 손목에 박혔고, 놀란 베를렌은 랭보를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응급처치를 마친 랭보는 파리로 가겠다고 다시 우겼다. 베를렌은 랭보를 역까지 바래다주다가 다시 발광하며 날뛰었다. 겁에 질린 랭보는 경찰에게 도움을 청했고, 베를렌은 즉시 구속됐다. 랭보는 소를 취하했지만 그들은 베를렌을 쉽게 풀어주지 않았다.

1년 반 후에 석방된 베를렌은 술을 마시면 어머니와 아내를 때렸다. 그를 누구보다도 사랑했고, 심지어 피 흘리는 랭보와 함께 병원에 달려가 준 어머니였다. 시골 중학교 교사가 됐지만 이번엔 제자와 부적절한 관계로 면직됐다. 아들 조르주는 기억상실증에 걸려 평생 아버지를 알아보지 못했다.

베를렌은 쉰두 살에 죽었다. 가난과 병마 때문이었다. 랭보가 죽은 5년 후이기도 했다. 출소 후 가톨릭에 귀의한 베를렌은 랭보에게 신에 대해 말해주고 싶었지만, 랭보는 차갑게 마음을 닫았다. 랭보는 세계를 떠돌다 암에 걸려서 서른일곱 살에 죽었다. 다리 하나를 잘라냈지만 온몸에 퍼진 암세포를 막지 못했다. 늙은 베를렌은 죽기 전 엄마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그들이 만난 것은 1871년의 가을이었다. 랭보는 열일곱, 베를렌은 스물일곱 살이었다. 베를렌은 소년 랭보에게 고답파 최고의 ‘진짜 시인’이었다. 간신히 베를렌의 주소를 알아낸 랭보는 글씨를 잘 쓰는 친구에게 자신의 시를 적어 달라고 부탁했다. 나흘 후 초조해진 랭보는 베를렌에게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얼마 후 답장이 도착했다.

“위대한 영혼이여, 어서 오시오. 우리는 당신을 원하고, 당신을 기다리고 있소이다!”

기차를 탄 랭보는 파리 북역에서 내렸다. 가방에는 베를렌에게 보여주기 위해 새로 쓴 ‘취한 배’가 있었다. 이 시는 광폭한 기세로 19세기 프랑스 문단과 대결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게 뭐가 중요할까. 마침내 만난 젊은 랭보와 베를렌은 반가워 서로를 껴안는다. 거리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태양은 투명하게 그들을 비춘다. 두 젊은 시인은 웃고 떠들면서 웅성거리는 파리의 거리를 함께 걸어간다. 푸르고 조용한 하늘 아래에서, 지붕 위에 일렁이는 종려나무 잎사귀와 슬피 우는 새를 바라보면서.

지난주 미술관에서 강의를 했다. 조금씩 비가 내리는 스산한 날이었다. 수강생은 대부분 예술가 지망생이었고, 짧은 수업을 마친 뒤에도 질문과 메일이 이어졌다. 물론 강의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수강생들이 절박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진이나 예술의 영역 어디에도 자신의 자리가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이들이었다. 오래전 내가 그랬듯이.

‘자신의 내장 속에 존재하는 어둠을 믿으세요.’

그렇게 답장을 쓰다가 문득 아연해졌다. 삶을 연료 삼아 예술을 얻는다는 관념, 혹은 격정과 고독으로 파멸하는 천재 예술가의 신화는 낡고 위험한 낭만주의의 유산일 것이다.

‘지독한 경험을 하지 않아도, 자신을 불태우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소설가 이언 매큐언은 수학 선생처럼 생겼는데도 악마 같은 글을 쓰잖아요. 인간은, 예술가는 먹은 것을 그대로 토해내는 단순한 존재는 아니니까요. 어쩌면 루만의 말처럼 좋은 정신은 건조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베를렌은 ‘예지’에서 이렇게 썼다.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삶을 불태우지 않았다면 베를렌은 자기 자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와 당신을 비롯한 모든 예술가 지망생에게 가없는 마음의 평화가 있기를 바란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